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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포럼 | <오후>의 장명숙
2001-06-08

내 사전에 ‘상투적’이라는 말은 없다

햇살이 쨍한 오후 2시. 한 사진작가는 실직한 것으로 보이는, 추레한 행색을 한 남자의 뒤를 밟는다. 하지만 골목으로 들어간 그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그녀는 다시 되돌아 나오는 길에, 한 청년을 만난다. 오른뺨에 길게 나 있는 흉터를 마주하기 전까지 그녀는 청년이 5년 전 자신이 골목에서 카메라를 들이댔던 한 꼬마임을 기억하지 못한다. 부레처럼 서서히 부상하는 기억의 칼날. 둘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뒤 서둘러 자리를 뜬다.

<오후>는 감독의 말 그대로, ‘단순한’ 영화다. 한 사진작가와 한 청년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이들이 떠올리는 5년 전 기억. 그게 전부다. 그런데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두 인물의 마주침을 통해 공간과 사건을 환기시키는 과정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과거와 현재, 카메라와 피사체, 거짓과 진실 등 다양한 각도에서 엿볼 수 있도록 압축해놓았기 때문. 전반부의 골목길 장면에서 보여지듯, 공간연출 또한 인상적이다. 일체의 사운드를 배제하고, 미세한 트래킹만으로 추적해 들어가는 골목길 장면이 대표적. 햇살 가득한 골목을 25mm 렌즈로 찍어놓았는데, 흡사 시간마저 침묵을 강요당한 듯 보인다. 그 골목에서는 피범벅이 된 개의

안구 운동 소리와 이를 클로즈업하는 카메라의 셔터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이 장면을 어떤 질감으로 가져갈 것이냐를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 조셉 L. 멘케비츠의 <지난 여름 갑자기>. 다시 구해서 본 것은 아니고, 기억 창고 속 몇몇 장면들의 공포스러움을 자꾸 떠올리며 작업했다. 올해 열린 제2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오후>로 온고을 단편상을 수상하는 등 호평을 받았지만, 스스로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있다. 흉터 때문에 사진찍기를 거부하는 아이에게 잡지에 실을 것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셔터를 눌러대던 그 여자. 이를 연기한 배우의 표현이 너무 일면적으로 강하게 드러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다. 그 사진작가의 행위는 도덕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열정으로도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인데, 그 뉘앙스가 잘 전달될지, 혹시 촬영 때 스스로 이미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자의식이 강해, 아직 대상에 접근하는 데 유연하지 못한 것 같다”는 그에게 교범은 아녜스 바르다와 다큐멘터리다. 어떤 식으로든 고정되길 거부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재위치시키는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나 일체의 선입견을 버리고 대상과 교감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 자신의 단점을 메워줄 것 같다. 95년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을 때만 하더라도 직접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말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중 뜻 맞는 선배와 공동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영화잡지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체계적으로 공부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상원 문을 두드렸다. 지금은 3학년. 자신의 관심은 인물에 맞추어져 있는데, 특히 도시 속 공간에서 ‘서걱거리며’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애정이 간다. 아무래도 대학시절 꼼꼼히 읽었던 최수철의 단편소설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게 그의 추측. 상투적이지 않은 이야기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손끝만큼은 코언 형제와 로버트 알트먼을 따를 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요즘 친구가 연출하는 작품의 조연출을 맡아 헌팅을 다니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세 딸의 서로 다른 기억과 감정을 세편의 꿈으로 풀어낼 요량으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것”이라는 그는, 여전히 젊다. 글 이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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