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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의 힘

아가씨, 좁은 페미니즘과 어설픈 마초주의를 벗어나는 여성들에 관해 생각하다

영화의 스토리는 쉽게 희미해지지만, 여배우의 사소한 몸짓과 날것의 표정만이 오래 기억될 때가 있다. <질투는 나의 힘>의 하숙집 딸이 그렇다. 한 소설가는 그녀를 “아무리 모욕해도 결코 자살할 것 같지 않은 여자”, “그 하찮음이 우주의 무게와 맞먹는 여자”라 분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그 여배우가 문성근과 배종옥과 박해일이라는 ‘고상한 먹물들’의 캐릭터를 압도한다. <사랑한다 말해줘>의 염정아도 드라마 자체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캐릭터다. 그녀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어떤 ‘권모술수’도 불사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남성의 욕망에 포획되지 않는다. 어떤 굴욕도 그녀의 생의 의지를 훼손할 수 없다. 그녀는 남성의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일종의 ‘자기충족성’을 실현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성현아는 언뜻 보면 남성의 꼬드김에 쉬 넘어가는 순종적 캐릭터다. 그러나 남성들은 그녀의 못 말리는 천진함과 아무리 짓밟아도 구겨지지 않는 생의 열정에 굴복한다. 숱한 남자들에게 버림받고 술집을 꾸렸다는 그녀의 소식에 김태우는 아연실색하지만, 정작 그녀 앞에서 무릎 꿇고 담뱃불로 팔뚝이라도 지져주길 구걸하는 것은 김태우다. “나 강간당했어”라고 투명하게 고백하는, 치명적인 정직함. “너흰 다 개새끼들이야. 너흰 섹스밖에 생각 안 하지? 그냥 안아만 주면 안 돼?”라는 칼칼한 비명으로 남자를 ‘동작 그만’시키는 뜻밖의 강인함. 배신때린 남정네가 10년 뒤에 다시 찾아와도 조건없이 보듬어줄 것만 같은 그녀에게는, 값싼 온정주의가 아닌 튼실한 내공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함이 서린다. 그녀는 ‘이미’ 김태우를 용서했지만, 끝내 그녀를 믿지 못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날을 세우는 것은 김태우다. 그녀를 정복하려 한 남자들은 스스로의 나약함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지만, 그들에게 짓밟힌 그녀는 비록 송아지만한 강아지로 외로움을 달랠지언정 남자의 미래를 저당잡지도 남자의 욕망의 액세서리가 되지도 않는다.

감독의 의도를 뛰어넘는 여배우들에게 남몰래 환호하는 재미가 쏠쏠한 요즘. 그녀들을 ‘탐스런 대상’으로 바라보던 관객은 어느새 스크린 속의 그녀가 오히려 우리의 내장을 속속들이 꿰뚫어보고 있음에 소스라친다. 최근 댄스 가수 중에서는 렉시가 그렇다. 렉시는 브라운관을 찢어내고 기다란 핏빛 손톱을 내밀어 관객의 목덜미를 잡아챌 것만 같은 눈초리를 지녔다. 렉시는 복종의 쓰디씀을 알면서도 기꺼이 복종하고 싶은 달콤한 열망을 자극하는 팜므파탈이다. 그러나 드라마 <불새>의 정혜영은 진정한 팜므파탈이 아니다. 그녀는 ‘악녀’일 뿐,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타인에게 확인받고픈 히스테리 증세로 시름하기 때문이다. 팜므파탈은 주목받지 못하면 잠을 설치는 뾰로통한 공주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최후의 매혹의 카드를 틀어쥐고 있는, 무한한 자긍과 열정으로 충만한 여성이다.

팜므파탈의 키워드는 ‘요부’나 ‘악녀’가 아니라 ‘자기충족성’이다. 팜므파탈의 원조는 그리스 신화의 요정 사이렌이다. 사이렌은 섬 위에서 천상의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하고, 사이렌의 노래에 굴복한 남성들은 즉시 사망한다. 자신을 숭배하는 대상들에 대한 냉혹한 무관심, 그것이 팜므파탈의 매혹의 진원지다. 2004년 최고의 팜므파탈은 카리스마와 푸근함을 동시에 품은 가수 인순이다. 그녀는 수십년 동안 그녀를 냉대했던 한국사회의 편견을 향해, 차라리, “It’ll be all right, all right”(괜찮아, 다 괜찮아)라는 나직한 용서로 화답한다. 대중의 편견에도 열광에도 휘둘리지 않기 위해 그녀가 삼켰을 숱한 눈물이 문득 심장을 후벼판다. 어떤 악의와 오명에도 흔들림 없이 스스로 충만한 팜므파탈에게서, 피해의식에 결박된 ‘좁은’ 페미니즘과 ‘어설픈’ 마초주의를 동시에 결별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한다.

정여울/ 미디어 헌터 subur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