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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라는 화두

건달, 남자의 비애를 고해하는 홍상수를 연민하다

맹수는 풀을 씹을 수 있는 이가 없다. 고기를 먹는 데 쓰는 기다란 송곳니는 풀을 씹는 데는 장애물이다. 고기를 얻기 위한 맹수의 사냥은 운명이다. 사냥하지 않으면 굶어 죽어야 한다는 불안과 사냥의 고단함 끝에 주어지는 고기 맛. 맹수는 고기 맛에 감각적으로 몰입할 때만 불안을 잊을 수 있다. 초식동물은 고기를 씹는 이가 없다. 풀을 뜯어야 하는 것 역시 초식의 운명이다. 초식은 사냥의 고단함 대신 사냥당함의 공포와 싸워야 한다. 지천에 널린 풀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은 안락함에 대한 대가다.

맹수의 불안과 초식동물의 공포는 운명이다. 삶을 운명으로 수용한 생명체는 반응할 뿐 반성하지 않는다. 맹수는 피맛에 도취돼 초식동물의 살육에 어떤 자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초식동물은 초식의 안락함에 중독돼 맹수의 발톱을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원한도 없으며, 불화하는 운명 속에서 평화롭게 공존한다. 적어도, 맹수는 초식의 풀을 탐내지 않으며, 초식은 맹수의 고기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꿈꾸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잡식이다. 잡식은 풀과 고기를 다 씹을 수 있는 이빨로 맹수의 불안과 초식의 공포를 다 없애버리고자 했다. 그런데, 스타(star)와 왕(king)을 동시에 추구했던 잡식의 꿈은 스타킹이 됐다. 고기를 먹으면서 초식의 공포를 염려하고, 풀을 먹으면서 고기 맛에 안달하는 번뇌가 잡식의 운명이라니! 나는 잡식이 운명을 대하는 태도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고기 먹고 배추 잎으로 입 가리는 잡식이다. 둘째는, 나는 절대로 고기 안 먹는다고 외치는 잡식이다. 셋째는 상추에 고기 쌈 사먹고 고민하는 잡식이다. 나는 이중에서 세 번째가 가장 마음에 든다. 어차피 잡식이 그 운명에서 못 벗어난다면, 첫째는 난폭한 사기이고, 둘째는 승산없는 위선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버릴 수 없는 잡식의 운명을 껴안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 정직하고, 정직은 모든 희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진지한 예술이 잡식의 운명을 대하는 태도는 다분히 자학적이다. 고기 맛에 길들여진 혓바닥으로 초식동물의 안위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화법은 육식의 공모관계에 있는 구경꾼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 불편함을 초래한 대가로 예술은 잡식의 운명에 대한 우아한 판타지의 의무를 진다. 풀만 먹으면서 초식의 공포와 육식의 자의식에서 해방되는 삶. 코끼리 판타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최후의 기의이다. 잡식은 그 겨냥의 긴장 속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코끼리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섹스라는 고기 맛에 길들여진, 자본주의 가부장제라는 정글 속에서 사냥에 정신이 없는 남자라는 잡식의 비애를 한없이 핥고 있는 한 남자가 있을 뿐이다. 그의 시선은 여자라는 초식동물의 성기를 탐닉하는 육식성 잡식 남자에 고정돼 있다. 그에게 여자는 다가가서 고해하고 싶은 존재이지만, 현재는 고해할 수 없는 아득한 풍경일 뿐이다. 왜냐하면, 고기 맛에 중독된 혀로 거짓 고해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포함한 모든 남자는 개새끼”임을 동어반복하면서 ‘코끼리가 되고 싶은, 그러나 되어지지 않는’ 잡식의 운명에 대해 탄식하는 것뿐이다. 격렬한 히스테리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잡식의 비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정직함. 나는 거기에 홍상수 영화의 희망이 있는 것 같다. 적어도, 그는 예쁜 코끼리 인형을 서둘러 들이밀며 희망을 가불하는 마취제 장사꾼은 아니다. 잡식의 심연을 향해 잠수해 들어가는 그의 퇴행은 코끼리 인형을 버리고 진짜 코끼리를 찾으려는 정신의 모험이다. 아름다운 배우와 현란한 빛과 감미로운 음악으로 코끼리 인형을 찍어내는 영화라는 장르의 안락함을 뿌리쳐야 하는 모험. 무구한 폐허 위에서만 평화롭게 어슬렁거리는 코끼리를 찾으려는 모험. 이 창조적 파괴가 완성되면 아마, 그가 지금 미장센 너머에서 키우고 있는 새끼 코끼리가 다 자라서 화면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오지 않을까? 그때쯤 여자는 미래의 풍경이 아니라, 얼굴을 파묻고 고해하고 싶은 현실의 존재로 클로즈업될 것이다.

영화를 소통의 채널로 여긴다면, 그리하여, 잡식의 운명을 구원하는 진지한 예술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홍상수의 영화는 역설적으로 가장 희망적이고, 그러므로 가장 정치적이다. 홍상수는 여전히 한국영화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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