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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핀 들꽃

아가씨, <트로이>와 <칼의 노래>에서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보다

영화 <트로이>에는 ‘아’와 ‘적’을 가르는 경계가 철조망이나 전선에 있지 않음을 읽어내는, 뜻밖의 삐딱한 시선이 있다. 멀리서 경계를 응시하면 경계는 이음새 하나 없이 정교하다. 그러나 경계를 껴안고 뒹구는 이에게는 경계 표면의 하찮은 ‘기스’ 하나도 불현듯 커다랗게 도드라진다. DMZ의 군인들에게 삼팔선은 굳건한 경계가 아니라 가끔은 구멍 숭숭 뚫린 소통의 출구로 보이듯. <공동경비구역 JSA>가 경계의 자그마한 틈새가 파열하여 절규하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감정의 구멍을 보여주는 것처럼. <트로이>의 인물들은 국가를 위한 전쟁에 몸바치기보다, 저마다 ‘나의 전쟁들’을 하나씩 품은 채 창과 방패를 벼린다. <트로이>에서 근육질의 수컷들이 펼치는 무용담의 매혹은 크지 않다. 오히려 거대한 서사의 틈바구니에서 분출하는 하찮은 에피소드들이, 삭막한 경계에 스민 자잘한 구멍들의 저력을 뿜어낸다.

아킬레스는 경계가 강요하는 복종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그리스가 승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확실히 튀어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왕의 명령에 툭하면 불복하고 ‘애국심’이라는 명분에 서늘한 냉소를 보낸다. 헥토르에게 전쟁은 갓난쟁이 아들이 결혼하여 손자를 보는 평범한 미래를 지켜내기 위한 삶의 도구일 뿐이다. 그에게는 전사의 명예도 동생에 대한 사랑에 비하면 사소하다. 그는 헬레네에게 전사의 ‘가오’를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죽음의 공포에 지쳐 자신의 무릎에 매달리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비통하지만 미련없이, 비겁하게 적을 찌른다.

헥토르가 죽음을 뻔히 예감하면서도 아킬레스에게 맞설 때. 그 ‘맞섬’은 대결이라기보다는 ‘적의 칼에 죽는 전사의 유일한 자연사’의 자리를 찾는 제의적 행위에 가깝다. 그는 싸움에 앞서 아킬레스에게 부탁한다. 우리 중 누가 먼저 죽든, 먼저 죽은 이에게 반듯한 장례를 치러주자고. 그는 전사의 최고의 영예는 스펙터클한 무술의 현시가 아니라 ‘잘 죽을 자리’를 찾는 일임을 안다. 아킬레스는 복수의 광기로 헥토르의 시신을 욕보이지만 프리아모스 왕의 ‘닮은 상처’와 연대함으로써 죽은 헥토르에게 용서를 구한다. 자네를 내 손으로 먼저 보냈지만 나도 곧 따라가겠노라고.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난 아킬레스와 헥토르는 ‘적의 적스러움’을 바닥까지 밀어붙인 끝에, ‘불가능한 우정’을 일구어낸다. 이렇게, 시인 함민복의 전언처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그리고 여기, 공포로 가득한 경계 위에 피어나는 또 하나의 들꽃이 있다. 이순신. 모두가 그를 기억한다. 위인전과 교과서로도 모자라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동상으로 떠받들어진 무사의 일생은, ‘임금과 국가에 대한 가열찬 충성’으로 무장한 채 한껏 견고한 아이콘으로 굳어져왔다. 전쟁의 거대서사로는 결코 복원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침묵당한 욕망을 메마른 복화술로 빚어낸, 김훈의 ?칼의 노래?. 저널리즘이 포획하는 ?칼의 노래?는 민족주의-영웅주의-허무주의라는 안정된 해석의 트라이앵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이 소설에는 ‘민족’과 ‘영웅’의 이미지로 요란하게 화장한 이순신이, 없다.

『칼의 노래』의 내밀한 전선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장치(임금과 조정)와 전쟁기계(이순신과 무사들, 이름 없이 전쟁을 견디는 백성들) 사이에서 더욱 날카로운 경계를 드러낸다. 백성의 딸들을 적의 침실에 팔아넘기는 자들은 오히려 조선인 관료들이다. 이순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이순신 없는 조선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무력하기에 가엾고, 가엾기에 무서운’ 임금이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무덤도 없이 죽어간 백성들은 임금과 조정의 무기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처연한 ‘인간방패’가 되어 암흑의 시간을 버텨냈다. 저잣거리 백성들의 웃음과 다툼 속에서 비로소 이순신은 나른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다투고 웃고 욕지거리를 하며 하루의 거래를 마무리짓고 있었다. 밥이 익는 향기 속에 시장기가 솟아났다. 그리고 노곤한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장터 멍석 위에서 잠들었다. 봄볕이 이불처럼 따스했다.” 죽음과 절망의 언어로 길어올린 폐허는, 삼엄한 칼로도 끝내 베어낼 수 없는 희망이다. 그 희망의 이름은 절망 이전보다 더욱 깊고 품 넓어진,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정여울/ 미디어 헌터 subur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