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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추억, <슈렉2>

아가씨, <슈렉2> 덕분에 그녀 안의 괴물과 화해하다

멀쩡한 일상이 뒤뚱뒤뚱 굴러가던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니 익숙한 실루엣이 온데간데없다. 피부는 파충류처럼 초록빛으로 번들거리고, 눈코입은 방금 막 행성을 탈출한 듯 제각기 따로 논다. 몸은 거대한 애드벌룬처럼 옹골차게 부풀어 있다. 아무리 볼따구니를 꼬집어도 아픔은 소름끼치게 생생하다. 그렇게 몇년이 흐른다. 새삼 거울 앞에 다시 선다. 어느새 괴물이 된 자화상에 익숙해진 스스로를 발견한다. 아직 젊디젊은 내 육체에, 내 히스테리를 견뎌준 가족에게, 문득 미안해진다. 이제 그만 세상 밖으로 나가자. 뻔질나게 보고 또 보니, 흉물스런 내 상판도 귀여운 표정으로 커버할 수 있겠는걸. 운동화끈 질끈 동여매며 대문을 박차는 순간, 가족들이 날 만류한다! “그 꼴로 어딜 가려구!” 이 순간, ‘괴물로 살아가야 하는 내 운명’과 ‘괴물이 된 날 부끄러워하는 가족’, 둘 중 어느 것이 더 슬픈 일일까.

방귀소리로 부창부수의 하모니를 연주해낼 만큼 콩깍지를 단단히 뒤집어쓴 든든한 낭군, 슈렉. 이토록 ‘행복한’ 피오나의 입장에서 보면, 괴물이 된 운명보다 처절한 아픔은 우리 ‘몬스터 커플’을 쪽팔려하는 아버지의 냉랭함이다. “저게 무슨 귀염둥이 딸래미야, 괴물이지”라고 외치는 아버지. 남편 슈렉도 토라졌다. “딸을 탑에 가둔 사람들이 무슨 부모야!” 피오나는 잊었던 사춘기의 아픔을 상기한다. 그래, 괴물이 되어버린 내 모습보다 무서운 건 아무도 내게 따스한 스킨십을 해주지 않는다는 거였어. 아버지마저도. “내일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파티를 여는데 아빠가 나를 못 가게 했다. 해가 지면 절대로 나를 못 나가게 하신다.” 초록빛 피부보다 두려운 건, 가족마저 나를 부끄러워한다는 것,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텅 빈 탑에 유폐되는 것이었다. 괴물의 공포보다 아픈 건 왕따로 살아가야 하는 공포였다.

그러나 괴물이라는 사실은 이제 날 괴롭히지 못한다. 남편 슈렉이 시도때도 없이 키스를 퍼붓는데 행· 불행을 따질 여유가 어디 있담. 당나귀 동키, 슈렉, 나는 각각 인종도 생물학적 분류도 다르지만, 이미 애틋한 가족이다. 나, 괴물 피오나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런데 세상이 우릴 내버려두지 않는다. 요정은 나를 신데렐라로 착각하는지 자꾸만 넓적다리 살을 제거해준다느니, 온갖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아준다느니 하면서 요정봉을 휘둘러댄다. ‘겁나먼 왕국’의 백성들은 우리가 얼짱커플이 아니라는 데 단단히 실망했다. 정말 행복해? 정말? 이렇게 묻는 듯한 그 불안한 눈초리들. 그냥 우릴 내버려두면 안 되나요? 우린 정말 행복한데. 눈에 콩깍지 씌어본 사람들은 다 알 거 아니에요. 그 콩깍지 덕분에, 방귀소리가 좀 크다든지 콧구멍을 아무 데서나 후벼파는 따위의 행동들조차 다 예뻐 보이는 거 아닌가요? 괴물의 사랑도 당신들의 사랑과 다를 바 없답니다.

<슈렉2>에서 피오나 공주가 얼짱커플의 삶을 거부하고 괴물의 삶을 택할 때, 아가씨도 그 앙증맞은 ‘장화 신은 고양이’와 함께 울었다. <슈렉2>는 내가 꽁꽁 숨기고 살아가는 ‘내 안의 괴물’을 끄집어내 햇볕에 말려주며, 이제 그만 그 괴물과 화해하라고, 이제 그 괴물과 손잡고 알콩달콩 살아가라고, 속삭인다. 나를 키운 팔할은,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왕따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내 안에는 늘 외로운 괴물이 숨어살았다. 그 괴물이 없었다면, 왕따의 기억이 없었다면,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텅 빈 놀이터에서 물기 어린 망막에 비친 노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 소중한 ‘빛’을 가능케 해준 ‘어둠’은, 내 안의 괴물이 만들어낸 착한 어둠이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상상력을 부채질한 동화들은 해피엔딩의 ‘공주내러티브’가 아니라 괴물 혹은 왕따들의 요절복통 모험기들이었다. 괴물의 상상력이야말로 내 꿈공장(Dreamworks!)의 진정한 보물창고였다.정여울/ 미디어 헌터 subur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