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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과 왕자님

가지고 싶지만 선뜻 가지고 싶다고 표현할 수 없는 대상 앞에 서면 우리는 초라해진다. 위축된 자신을 추스르는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쯤은 그럴 게 아니라 선망의 눈길을 가려주는 가면을 쓰고 주위를 맴도는 것은 어떤가. 기회가 생길 때까지.

<파리의 연인>이 원하는 대상의 주위를 맴도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공간성이다. 파리는 자유다. 파리는 불꽃이다. 파리는 온갖 잡스러운 계층과 물건이 뒤섞여 요동치는 불가마이다. 명품숍이 즐비한 샹젤리제 거리 한구석에 더러운 거지가 뒹구는 그 자체가 예술일 수도 있음을 천연덕스럽게 전시하는 오만한 과시장이다. 그런 곳에서 잿빛의 신데렐라는 숨을 쉰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차단된 공간에서 은빛성의 왕자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쇼윈도의 화려한 명품을 환상할 수 있는 광장이 아니면 안 된다. 그곳이 태영(김정은)이 살고 있는 곳이고, 캔디가 살았던 곳이고, 명랑소녀가 재잘거리던 곳이기도 하다. 자주색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서 무일푼의 소녀가 슬픈 듯, 기쁜 듯 개념없이 들락거린다. 우리 속의 파리는 언제든 울음 섞인 눈망울에 장난스러운 입가의 미소를 지닌 귀여운 여인을 탄생시킨다.

두 번째는 의외성이다. 철옹성 같던 벽이 우리에게 슬금슬금 내려온다. 정감의 일렁임 앞에서 수줍은 듯 서툴다. 기주(박신양)가 찜질방에서 서른개짜리 계란 한판을 들고 묻는다. “계란을 세개두 팔어?” 파리의 호화판 아파트에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를 찜질방으로 데려오고 바닥에 질펀하게 늘어져 자는 태영 옆으로 끌어다 앉힌다. 원하는 대상의 주위를 머뭇거리며 기회를 엿보는 이들에게 의외의 순간들은 삶의 기쁨이다. 불현듯 “자고 갈래?” 그 한마디면 온몸이 녹아내린다. 그래서 자꾸 그 앞에 서면 눈물이 난다. 엄마의 태반처럼 이유없이 자양분을 공급해주고 살게 해줄지도 몰라서. 가치가 정확히 등가로 교환되어야 하는 시장논리에 혹사당하는 개인들은 언제든 왕자가 던지는 생각없는 한마디에 울고 웃는다. 기주가 살고 있는 곳, 그곳은 원칙성과 의외성이 무시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곳이다.

세 번째는 진정성이다. 진심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영혼의 외로운 방황 앞에서 가진 것 없는 자들은 또 머뭇거리게 마련이다. 수혁(이동건)은 왕국의 서자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주변인이기 때문에 주목받는다. 중심 인물이 아니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온몸으로 진실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유일한 재산, 가슴속 “안에는 니가 (오롯이 버티고) 있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이들 셋은 갈등하는 평행선이다. 파리의 부유하는 욕망과 원칙에 충실한 간혹의 예외는 진실성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태영은 온몸으로 부서져오는 수혁의 진실을 자꾸 비켜선다. 예외적으로 눈길이 가는 귀여움을 휴대하기에는 입고 있는 왕자의 복장이 가리고 선다. 그래서 기주는 의외성을 일상으로 정착시키고 싶지 않다. 덕분에 우리는 어느 것이나 즐기고 있다. 귀여운 여인의 귀여운 짓과, 드넓은 넥타이의 왕자님의 절제된 듯한 어눌함과, 막 입은 듯한 점퍼 차림의 방랑자의 턱수염까지. 현실의 무시무시한 협박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텔레비전 앞에서 즐겁다. 때로는 긴장없이 욕망을 일렁거리게도 할 수 있고 원칙에서 벗어나는 의외의 사건들의 묘미 속에 잠길 수도 있고 비현실적인 순정파들의 체하는 모양새에 거북해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재미있다. 그래서 어느새 시청률은 40%를 넘겼다.

그런데 재미있게 몰입된 한 꼭지에는 늘 석연치 않은 순간이 있다. 드라마 속 이미지를 패션을 통해 소비해보고 싶은 소비자의 일렁이는 욕망에 철저하게 복속당하는 노예근성이 확인되는 때이다. 파리연인의 로맨틱 코드를 잡으라는 지상명령이 떨어졌나. 모두들 열심히 찾는 중이다. 그들의 의상, 그들의 소품을. 줄줄이 이어진다. 파리로의 여행객이. 중국어가 판치는 제2 외국어 시장에서 외면받아 비명을 지르던 불어가 드디어 기염을 토한다. ‘보라! <파리의 연인>이 우리를 살렸노라.’ 독어 상품은 없는지. 왜 프랑크푸르트에는 연인이 살지 않는가.

드라마가 가진 흡인력에 빨려들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낯익은 진열대의 상품을 고른다. 왕국은 파리에 있지 않다. 재벌 2세의 의외성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면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주는 드라마의 세계, 그곳이야말로 트렌드를 만드는 곳이고 욕망이 폭주하는 곳이고 그곳이 바로 왕국이었다. 素霞(소하)/ 고전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