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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 고 홈, 위드 미

“양키 고 홈.”

영화 <헤드윅>의 주인공 ‘한셀’의 망토 오른쪽에 적힌 글귀다. 한셀은 ‘미국물’이 든 동독 꼬마였다. 어릴 때부터 미군 라디오 방송에 빠졌다. 데이비드 보위에 열광했고, 루 리드가 우상이었다. 그는 베를린의 철조망을 넘어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미군 흑인 병사가 그의 꿈을 현실로 바꿀 청혼을 한다. 한셀이 ‘여자’가 되는 조건으로. 한셀은 성전환 수술을 받고 헤드윅이 된다. 동독을 떠나기 전, 한셀이 드랙쇼를 하다 망토를 펼친다. 그 망토의 오른쪽에는 “양키 고 홈”, 왼쪽에는 “위드 미”가 박혀 있다. 태어난 땅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이들의 슬픔을 이토록 간결하게 요약한 말을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진보’물까지 먹은 성소수자라면, 양키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일 수밖에 없다. 양키도 싫지만, 한국이 더 싫은 자들의 비애.

나의 ‘접시’는 한셀의 라디오다. 요즘 미국병이 단단히 들었다. 날마다 미국 드라마만 보고, 미국 토크쇼만 즐긴다. ‘접시’를 달고 난 뒤에 생긴 병이다. 접시와 케이블을 타고 퍼지는 일종의 돌림병이다. 나야 케이블 텔레비전도 안 들어오는 후진 아파트에 살다가 겨우 한해 전 접시를 달고 미국물이 들었지만, 이미 수많은 언니 오빠들이 집에 앉아서 미국물을 먹었다고 한다. 겨우 <프렌즈>와 <섹스 & 시티>에 맛을 들일 무렵, 이미 두 시리즈는 굿바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어메리칸’ 프렌즈를 알게 되고, 뉴요커의 환상에 빠진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딱 1년만, 뉴욕에서 살아보는 것은 새로운 꿈이 됐다.

늦은 귀가 탓이 크다. 도저히 밤 10시에 시작하는 SBS 드라마 스페셜도, MBC 특집기획 드라마도 볼 수가 없다. 어제 나가서 오늘 들어오니까. 집에 도착하면 공중파에는 시시껄렁한 프로그램들만 나온다. 채널은 당연히 위성방송으로 넘어간다. 자정 넘어 시작하는 OCN의 <섹스 & 시티>를 보면 ‘다행’이다. 대개 도착해서 리모컨을 누르면 온스타일의 <오프라 윈프리 쇼>가 나오고 있다. 새벽 1시를 넘긴 시간, 마침 어머니는 방에서 주무신다.

지상 최대의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박장대소할 유머도, 뒤집어지는 구성도 없었다. 오프라의 진행도 유연하긴 했지만, 탁월하지는 않았다. 다만 섭외력이 탁월했다. 마돈나와 비욘세라니. 그들이 오프라를 만나는 일은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었다. 일종의 ‘의례’였다. 여왕을 알현하고 귀족 작위라도 받는 분위기다. 그래서 오프라를 보면 ‘알고 있던’ 아메리칸드림을 ‘느끼게’ 된다. 그의 50번째 생일파티 방송을 보면서였다. 정말 오프라는 미합중국의 ‘공주’더라. 책 제목처럼 <신화가 된 여자>였다. 존 트래볼타가 사회를 보고, 티나 터너와 스티비 원더가 축가를 부르고, 래리 킹이 축하인사를 하러 5시간을 날아오고. 축하 영상을 보내온 스타들은 넘쳐났다. 톰 행크스, 짐 캐리, 니콜 키드먼…. ‘시간 관계상’ <섹스 & 시티>의 네 주인공은 한꺼번에 인사를 했다. 참, 생일 아침에는 넬슨 만델라가 축하전화를 걸었고, 낸시 레이건도 생일파티에 참석했다. 며칠 동안 성대한 파티가 계속됐다(생일파티 다음회의 제목은 ‘Behind the scenes of Oprah’s Birthday Weekend’였다. 생일 주간!).

<오프라 윈프리 쇼>는 끊임없이 속삭인다. ‘너도 노력하면 그처럼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수 있다’고. ‘뚱뚱한 10대 흑인 미혼모에서 매력적인 50대 연예재벌이 된 그녀를 보라’고. 게다가 ‘그는 남아공의 굶주리는 어린이를 돕는 천사’라고. 달콤한 꿈으로 돈 드는 복지를 대신하는 미국사회의 속삭임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연예인 오프라 윈프리가 2003년에 벌어들였다는 1억4천만달러(1624억원)는 미국사회가 지출하는 일종의 복지비용처럼 보인다.

이처럼 아메리칸드림은 허상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미국병이 부끄럽지 않다. 친미도 싫지만 반미도 마뜩찮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부 민족주의자의 반미 선동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노래 <퍼킹 USA>를 혐오한다. 여성주의자 정희진씨의 지적처럼, 미군이 한국 여성들을 강간했으니 한국 남성도 미국(정확히는 여성)을 ‘퍼크’하자는 민족주의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우리도 이만큼 컸으니 미국에 한번 ‘개겨’보자는 정서는 반미가 아니다. 단지 ‘양키포비아’일 뿐이다. 얼치기 애국주의가 판치는 한, ‘소수자’들에게 미국은 여전히 ‘오! 꿈의 나라’다. 나의 슬로건은 ‘양키 고 홈, 위드 미’. 오늘도 접시를 타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