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인
아방가르드의 산 역사, 장 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광주국제영화제와 세네프에서 회고전 여는 장 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다니엘 위예와 장 마리 스트로브의 영화를 이 땅에서, 그것도 보름 사이에 두곳에서 볼 수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설렌다. <시칠리아>나 <화해불가>가 간간이 국내에 소개되긴 했으나, 전작을 온전히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이름은 신비롭기만 했다. 흔히 아방가르드 혹은 정치적 모더니스트로 풀이되곤 하는 스트로브 부처의 작품 세계는 기실 그리 간단히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스트라우프’ 혹은 ‘스트라우브’라 불리는 장 마리 스트로브(그는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읽는다. 그의 원래 이름은 장 마리 비아네였다)는 1933년 1월8일 메츠에서 태어났다. 메츠가 속한 알자스, 로렌 지방의 역사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바 있다. 메츠는 보불전쟁의 결과로 프로이센에 병합되었다 1차대전 때 수복되었고, 1940년 나치에 다시 접수되어, 도합 15년에 걸쳐 독일의 지배를 받은 바 있다.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가 식민 이후의 사회·문화적 결과를 그려보기는 어렵지 않다.

브레송·폰 슈트로하임·존 포드에 감화

“나는 <화해불가>의 노부인 조안나처럼 염소 자리 아래에서 태어났다. 막스 자콥의 말대로, 모든 염소 자리 출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늙어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예수 공현 축일 뒤의 일요일, 로렌의 주도 메츠에서 태어났다… (중략) 그해는 정확히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일년 전이었다. 1940년까지는 학교나 집에서 불어만 썼다. 그러다 갑자기 독어를 쓰기 강요당했다. 학교에서 불어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의 피식민 경험은 먼 후일, 동향 출신 소설가 모리스 바레즈의 <꼴레뜨 보도쉬>를 영화화한 <로트링겐!>(1994)으로 드러난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썼다. 그 시절 만난 작품들이 그의 평생에 영향을 끼쳤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모든 위대한 감독들의 스승이었던 로베르 브레송이다. 앞서 언급한 구태의연한 메츠 극장들의 프로그래밍 탓에 50년대 초반까지 단 한편의 브레송 영화도 본 적이 없었다고 스트로브는 회고한다. 그 시절 그에게 감동을 주었던 영화는 <여름빛> <견인> 등 장 그레미용의 작품들이다. 리처드 라우드는 스트로브에 대해 쓰면서, 스트로브 작품들의 영화사운드 개념이 전혀 다르긴 하나 작곡가 출신인 그레미용이 특히 영화에서 사운드의 중요성 자체를 그에게 깊이 각인시켰다고 했다. 예를 들어 미셸 모르강과 장 가뱅이 주연한 <견인>의 배장면에서, 그레미용은 배의 엔진소리, 음악소리와 그가 따로 만들어낸 소음을 혼합한다. 그 결과 얻어지는 효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한 것이었다.

그뒤 본 로베르 브레송의 <블로뉴 숲의 귀부인들>,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작품들에 감화받은 그는 급기야 영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평생에 걸쳐 그가 꼽는 고전영화의 최고작들도 언제나 브레송, 폰 슈트로하임, 거기에 존 포드를 보탠 정도이다). 1954년 파리로 이주한 그는 아벨 강스(<넬 탑>), 장 르누아르(<프렌치 캉캉> <엘레나와 남자들>), 자크 리베트(<목자의 타격>),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여자의 일생>), 브레송(<한 사형수가 탈옥했다>)의 영화에 연출부로 참여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평생의 반려이자 정치·영화적 동지인 다니엘 위예를 파리에서 만났다는 사실이다. 스트로브보다 세살 아래인 다니엘 위예는 그를 만나기 전에 이미 영화에 뜻을 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국립영화학교 페미스의 전신인 이덱(L’IDHEC)의 입학시험을 치르려 했다. 당시 입학 시험에 대한 그녀의 술회는 매우 흥미롭다.

“나는 입학시험을 치른 적이 없다. 그들은 나에게 이브 알레그레의 영화 <회전 목마>를 분석하라고 했다. 나는 형편없는 영화라는 세줄의 글만을 남기고 시험장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몬느 시뇨레의 연기가 훌륭했지만.”

미에 대한 사랑과 현실 정치에 대한 증오 그려내

장 마리 스트로브

누군가는 그들의 영화 세계를 가리켜 ‘사랑과 증오의 세계’라 했다. 이상적 미를 향한 사랑, 현실 정치에 대한 증오를 그들의 영화에 담아왔다는 말이다. 한편, 그들의 작품 세계를 다룬 영미권의 책 제목으로, <저항의 전망>이 있다. ‘저항’이 그의 삶과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단어인 까닭이다.

그는 그의 영화 제목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에서 저항으로’ 역사를 인식하고, 타협없이 영화 만들기를 실천하며 평생을 살았다. 해방 직후 메츠 시립영화관들이 상영하는 구태의연한 프로그램들에 항의하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이미 공권력과 부딪힌 경험이 있는 스트로브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저항’적 기질을 발휘한다. 메츠 거주 알제리인들을 탄압하는 경찰에 항의하다 격렬한 물리적 충돌을 겪은 것이다. 1958년 알제리 전쟁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망명한 일은 그의 비타협적인 저항 정신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치열한 독립투쟁과 그에 맞선 프랑스군의 잔인한 진압으로 야기된 알제리 전쟁은, 당시의 청춘들에게 작금의 이라크 전쟁처럼, 더러운 죄악의 이름에 다름 아니었다. 국경을 오가며, 가진 것 없이 독일로 망명한 그를 뒷바라지한 것은 물론 다니엘 위예였다.

흔히들 장 마리는 주로 카메라를, 다니엘은 편집을 담당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작업 현장을 증언한 하룬 파로키 등 후학들의 다큐멘터리만 지켜보더라도 마치 헤르마프로디테처럼 나눌 수 없는 한몸의 창작자로 공존하는 그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미 국내에 상영했던 페드로 코스타의 다큐멘터리 <사라진 당신들의 미소는 어디로>에서 장 마리 스트로브가 다니엘 위예와의 첫 만남을 술회하는 모습과 작업에 방해가 된다며 그를 새된 소리로 다그치는 다니엘 위예의 장면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안긴다. 반세기를 함께 창작하고,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여전히 서로 존대하는 그들의 관계를 일컬어 이성애, 동지애 혹은 부부애라고만 하기엔 말의 한계가 너무 크다.

망명 첫해, 스트로브는 히치하이킹으로 동·서독을 횡단하며 첫 작품으로 구상한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1967)의 촬영지를 찾으러 다녔다. 단편 <마쇼르카-머프>(1963) 등으로 주목받으며 오버하우젠 선언에 참여한 그들은 베르너 라이너 파스빈더,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그 등의 독일 감독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명배우 한나 쉬굴라의 영화 데뷔작이었던 <신부, 여배우 그리고 포주>(1968)에는 파스빈더가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또 <화해불가>(1965),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1967) 등 그들의 주요 초기작을 모두 독일에서 제작하였다.

영화사상 가장 유물론적인 걸작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

‘도살장의 성 쟌느’의 입을 빌렸던 브레히트의 경구, ‘폭력만이 폭력이 지배하는 곳을 돕는다’라는 부제를 지닌 <화해불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역사 청산의 문제를, 1차대전과 나치즘을 거치며 상처받은 한 부르주아 가족의 역사로 전유하여 다룬다. 바흐의 두 번째 아내 안나의 일기를 영화화한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 덕에 그의 영화는 이른바 ‘구조영화’의 전범으로 불렸고, 고다르는 이 영화에 “영화사상 가장 유물론적인 걸작”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1968년, 뜨겁던 파리를 뒤로 한 그들은 로마에서 불어로 영화 <오돈>을 촬영하였다. 원래 루이 14세 치하의 정국을 풍자할 목적으로 프랑스의 극작가 피에르 코르네이유가 쓴 희곡인 <오돈>은, 네로의 뒤를 이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갈바가 거느린 장군의 이름이다. 영화는 로마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두 언덕과 2차대전 때 레지스탕스들의 투쟁무대였던 한 동굴에서 시작한다. 스트로브는 서기 68, 69년 고대 로마의 의상을 입은 배우들과 폐허가 된 유적, 1968년 현대 로마의 자동차 클랙슨 소리, 도시 풍경을 병치하며 소격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에서는, 영화의 부제- 언젠가는 로마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하여 눈뜰- 가 진술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민중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다. 민중의 부재를 보여주는, 들뢰즈적 의미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영화가 된 것이다. 서기 68년의 로마제국뿐 아니라 1968년 서유럽의 상황이 그랬다. 고전기 불어에 대한 실험 또한 스트로브 부처가 <오돈>에서 공들인 것이다. 두달간의 구두 훈련을 거친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각 나라 비전문 연기자들의 다양한 억양과 훈련된 구음은 원래의 텍스트보다 더욱 직접적인 현존성을 느끼게 한다. 악인 라쿠스를 직접 연기하는 스트로브를 볼 수 있는 것 또한 이 영화의 재미다(다니엘 위예는 <화해불가> <혁명은 한번의 주사위 놀이> <검은 죄> 등에서 여러 차례 배우로 나선 바 있으나, 허구의 인물을 스트로브가 연기하는 것은 <오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스트로브의 군복무 기피 공소시효가 끝난 뒤에도, 브레히트(<역사 수업>(1972), <안티고네>(1991)), 횔덜린(<엠페도클레스의 죽음>(1986), <검은 죄>(1988)), 쇤베르크(<쇤베르크의 영화음악 입문>(1972), <모세와 아론>(1974), <오늘에서 내일까지>(1996)) 등 비판적 이성의 독일 문화는 그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제공해주는 훌륭한 원천으로 남았다.

인간의 목소리의 발화와 그 해독에 대한 연구이기도 한 <오돈>에 이어 <쇤베르크의 영화음악 입문>으로 스트로브 부처는 목소리와 발화가 레코드로 취입되고 기계에 녹음되었을 때 나타나는 효과를 연구한다. 흔히 촬영된 이미지와 함께하는 스피커의 목소리를 관객은 정당한 것, 공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스트로브 부처는 이러한 믿음 자체를 심문에 회부함으로써 시대의 지배적 담론에 균열을 가하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나치즘하의 쇤베르크와 중동전쟁의 포화를 바라보는 스트로브의 공통된 주제는 시오니즘과 반유대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시오니즘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쇤베르크와 브레히트, 칸딘스키 사이의 논쟁적 서한을 다룬 이 영화는, 중동전쟁과 줄기찬 팔레스타인해방전선의 투쟁 와중에 탄생한 그들의 ‘유대 삼부작’의 첫 작품이다. 이후 <포르티니/개> <모세와 아론>이 그뒤를 따른다. 브레히트의 소설 <줄리어스 시저의 사생활>을 영화화한 <역사 수업>은, 현대인이 로마시대로 돌아가 자본주의의 싹을 틔운 유명인들과 인터뷰한다는 흥미진진한 얘기를 <오돈>을 연상케 하는 형식에 담았다. 쇤베르그의 오페라를 영화화하는 첫 시도였던 <모세와 아론>에서, 스트로브 부처는 말씀의 권능을 지닌 시오니스트 모세보다 이미지로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며 영원한 유목민을 꿈꾸는 아론의 편에 선다. 거기에 팔레스타인들의 고토를 강탈하는 대신 아프리카 어느 오지에 새 이스라엘의 건국을 꿈꾸던 쇤베르그의 모습이 겹쳐진다.

카프카·파베제 등 많은 문학작품 영화화

다니엘 위예

90년대에 다시 쇤베르그 오페라의 세계로 돌아온 <오늘에서 내일까지>는, 대공황을 불러온 자본주의하에서의 현대성과 현대의 모럴에 대한 탐구랄 수 있다. 윌리엄 루브찬스키의 흑백 촬영은 신기의 경지이다. <포르티니/개>는 <쇤베르크의 영화음악 입문> <모세와 아론>에 이은 위예-스트로브의 유대 삼부작 완결판이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좌파 문필가 프랑코 포르티니는 파문당한 유대인이자 프리메이슨이었으며 마르크시스트로 파시즘 치하에서 수감 생활을 했던 아버지를 두었고, 어린 시절 마치 마르크스의 아버지처럼, 파시스트들에게 박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그 자신 이탈리아 공산당 피렌체 지구당원이었으나 탈퇴한 포르티니는 1967년 6월, 6일 전쟁 직후에 한권의 책을 쓴다. 그것이 <시나이의 개들>이다. 스트로브 부처는 이 책과 이에 더한 한권의 팸플릿에 기초하여 1976년 제2차 중동 전쟁 와중에 이 영화를 만든다. 그와 언제나 창조적 호흡을 함께하는 고다르는 이즈음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투쟁을 다룬 <여기와 다른 곳>을 찍고 있었다. 시오니즘을 유대 전통의 질서와 분리하여, 친미 친자본주의 군벌들의 발호로 치부하는 포르티니는 영구화되어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앞에서 절규한다. “박해받는 자는 언제나 누군가의 유대인이다.” 고로 포르티니에게는, 팔레스타인인들도 이스라엘 정부의 유대인이다.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소련의 편이 되는 것이 포르티니에게는 “시나이 산의 개 노릇을 하는 짓”이다. 그러나 포르티니의 증언에 따르면, 시나이 산에 개는 없다.

스트로브 부처는 독일어 원전들 외에도 많은 문학 작품들을 영화화했다. 프란츠 카프카(<아메리카-계급 관계>(1983)는 물론이고, 체자레 파베제(<구름에서 저항으로>(1978)), 엘리오 비토리니(<시칠리아!>(1998), <노동자, 농민>(2000), <모욕당한 이들: 탕아의 귀환(2002)> 등 저항적 전통을 자랑하는 이탈리아 문학을 옮긴 영화들은 그들의 ‘지중해 시대’라 불린다.

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마무드 후세인의 서한을 프랑스와 이집트의 농촌 풍경과 병치한 <너무 이른, 너무 늦은>(1981), 세잔의 그림과 루브르의 명화들을 탐색한 <세잔느>(1989), <루브르 방문>(2003)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재료들을 활용한다. 근대 회화의 거장 세잔에 대한 영화를 만들며, 그들은 흔한 미술다큐멘터리의 길을 거부했다. 그 대신 20세기 초 요아킴 가스케가 세잔과의 대화, 편지 등을 모아낸 <그가 내게 말한 것>에 기대 다니엘 위예의 목소리로 이 텍스트들을 다시 불러온다. 결국 장 르누아르의 <보바리 부인>과 세잔의 <밀짚모자의 노파> 혹은 회화와 영화의 공통점을 발견해내는 위대한 이 영화를, 의뢰했던 오르세 미술관이 완성 뒤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세잔느>의 속편격이라 할 <루브르 방문>은 스트로브와 위예의 최신작이다. 세잔이 늙어서 더이상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었던 1900년경 루브르를 방문했던 일화를 한 세기 뒤에 재구성한 영화이기에, 제목이 ‘나는 세잔느다’가 될 뻔도 했다. 이번에는 세잔의 그림들이 아닌 미술사의 걸작들이 차례로 보인다. 지금은 오르세에 있는 쿠르베의 <사슴들의 싸움>, 베로네즈의 <가나의 결혼>,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들라클로아의 <십자군의 입성>,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등이다. 역시나 1912∼3년 사이에 쓴 요아킴 가스케의 <그가 내게 말한 것>에 기대고 있는 이 영화는, 여성의 목소리로 재현되는 세잔의 음성의 현존과 그의 육체의 부재, 그의 시야에 잡히는 루브르 소장 명화들의 이미지들이 맞물려 새로운 방식의 픽션 내러티브를 발명해 낸다.

전통적인 테크놀로지만을 고집

이상 일별해본 그들의 작품세계는 서너쪽으로 압축하기엔 심원하기만 하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보다는 오페라, 연극, 시, 소설 원작 텍스트들의 소재를 선호하지만 그들의 영화 창작 원칙은 매우 엄격하고 단호하다. 그들은 비디오나 디지털로 작업하지 않고 오로지 필름만을 고집한다. 여전히 스테인 벡 편집기만을 쓰는 그들은 영화시작 크레딧에 자랑스럽게 ‘돌비 사운드를 채용하지 않았다’고 공개한다. 전통적인 테크놀로지로 이루어진 그들의 작품 한편 한편은, 영화미학의 역사 자체이자 그 역사에 대한 개입이다. 또한 영화의 본래적인 언어들인 사운드와 이미지의 변증법, 피사체와 공간과의 관계, 카메라와 피사체의 관계에 대한 탐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하고 예민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그들의 영화를 보는 행위는 영화예술과 인간, 세상의 비의를 엿보는 기쁨을 안긴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