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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영화전사의 충무로 입성기
2001-06-20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23 공수창 (1961∼ )

<파업전야>는 충격이었다. 보수우익세력에게는 되바라진 도발이었을지 모르나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영화라는 매체를 새롭게 ‘발견’하는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작품이 <파업전야>다. 사실 그 이전까지 영화라는 매체는 친숙하긴 하되 우리와는 상관없는 그 무엇이었다.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표현하자면 부르주아들이 만들어 유통시키는 킬링타임용 상품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파업전야>는 우리의

이야기였고 우리의 믿는 바였다. 세상에, 그들만의 것인 줄 알았던 영화가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다니! <파업전야>의 제작과 상영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쟁이었다. 일반극장에 들어갈 수 없어 주로 대학캠퍼스를 돌며 상영했는데 그때마다 학교 당국은 물론 교문을 완전히 에워싼

전투경찰들과 대규모 전투신(!)을 몇 시간씩 벌인 다음에야 가까스로 볼 수 있었던 영화가 <파업전야>다.

<파업전야>의 작가 공수창의 필모그래피는 1987년 단편영화 <인재를 위하여>까지 거슬러올라간다. 훗날

<접속>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장윤현 감독이 학생시절 만든 이 작품을 쓴 사람이 바로 같은 학교의 영화동아리 ‘소나기’의 선배였던

공수창이었다. 당시의 학생운동가들이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했던 모진 고문의 후유증을 다룬 작품인데 그 접근방식이나 캐릭터 묘사가 대단히 인상적이어서

1980년대를 대표하는 단편영화로 꼽힌다. 공수창이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한 다음 좌파적 성향의 영화운동집단 ‘장산곶매’에 가입하여 쓴 첫 번째

장편영화 시나리오가 <오! 꿈의 나라>다. 광주항쟁을 통하여 확인하게 된 미국의 실체를 동두천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반추해보는 형식의

이 영화 역시 비상업적인 유통구조에도 불구하고 1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위에 언급한 장윤현과 오늘날 <`공동경비구역 JSA`>의

제작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이은 그리고 역시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으로 데뷔한 장동홍이 공동연출한 작품이다. <오!

꿈의 나라>가 광주항쟁을 다룬 최초의 장편극영화라는 영화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완성도면에서는 다소 미흡했다면, <파업전야>는

독립영화도 재미와 완성도에서 당당히 상업영화와 어깨를 견줄 수 있음을 통쾌하게 증명해낸 수작이다. 특히 서로 다른 세계관과 개성으로 낱낱이

분열되어 있던 노동자들이 굳건히 어깨를 엮고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올 듯 달려오는 라스트신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공수창이 충무로에 입성해서 만든 첫 번째 장편상업영화가 <하얀전쟁>. 안정효의 원작소설을 솜씨좋게 각색한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고루 높은 점수를 받았다. 여지껏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베트남전 영화들 중에서 단연 최고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로

테러리스트가 된 사나이 이야기를 다룬 것이 <비상구가 없다>이고, 여덟살 고아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성장영화가 <우연한 여행>인데

모두 흥행에서 쓴잔을 마셨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은 전형적인 멜로다. 그러나 지나치게 예쁜 화면에 담긴 이 동화 같은 이야기

역시 관객의 외면을 받았을 뿐 아니라 “80년대 영화전사들, 너무 쉽게 투항한다”는 뼈아픈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연달아 세 작품을 실패한

이후 공수창은 전열을 재정비한다. 그는 싸움꾼답게 상업적 장르영화의 시도를 철회하기는커녕 오히려 좀더 깊숙이 파고드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좀더 철저히 상업적인 동시에 장르영화의 컨벤션을 완전히 소화하여 끝까지 밀어붙인 작품들이 최근작인 <링>과 <텔미썸딩>이다.

<링>은 널리 알려진 일본영화를 솜씨좋게 번안하여 각색한 작품인데 원작 못지않은 공포감으로 관객을 끌어모았다. 국내에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하드고어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에 입각하여 쓰인 작품이 <텔미썸딩>이다. 이 작품은 지독하게 꼬여 있는 플롯과 뭔가 미진한

퍼즐맞추기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흥행성적을 올렸고 해외시장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영화운동권의 열혈전사가 괴롭고 험난한 뒤안길을 돌고 돈 끝에

이제야 충무로 시장에 안착한 느낌이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동갑내기 동업자의 활약상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신선한 자극과 즐거움을 준다.

심산/시나리오 작가

■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89년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

1990년 장산곶매의 <파업전야> ⓥ ★

1992년 정지영의 <하얀전쟁> ⓥ ★

1993년 김영빈의 <비상구가 없다> ⓥ

1994년 김정진의 <우연한 여행> ⓥ

1998년 장동홍의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

1999년 장윤현의 <텔미썸딩> ⓥ ★

1999년 김동빈의 <링> ⓥ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