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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 다이어리 >에 출연하는 이현우
사진 오계옥김혜리 2004-10-07

“이현우로 살아가는게 편하다”

그는 수줍은 것일까? 아니면 심드렁한 것일까? 이현우의 얼굴은 그가 대중예술인으로 활동한 13년간 <모나리자> 앞에 멈춰선 미술관 순례자의 그것과 비슷한 갈등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사실 그의 표정은 10여년간 한결같다. 하지만 그 여일한 표정의 느낌은 어느 순간- 마치 쿨레쇼프의 몽타주 실험처럼- 반전됐다. 광장에 버려진 소년의 안면 경직처럼 보였던 표정이, 도회적 체념과 낙관의 기호로 변한 것이다. 아마 달라진 것은 그가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들이 속한 문화일 것이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언젠가부터 이현우는, 더 오래 일하고 더 오래 남자와 우정을 나누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원하는 동행자로서 이미지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미지는 여자가 선망하는 자질을 뭉뚱그린 우상이 아니라, 여자가 필요할 때 있어주고 불필요할 때 물러서 있는 편리한 파트너에 가깝다. 돌봐주지 않아도 좋고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이현우가 5월의 신부가 된다. 오타가 아니다. 10월22일 개봉하는 <S 다이어리>의 세 남자 가운데 지니(김선아)의 첫사랑인 성당 오빠 신구현이 이현우의 역이다. 엉겁결에 재수생 지니의 첫 섹스 파트너가 된 구현은 죄의식에 눈물짓다가 5월의 신부(神父)가 되어버린다. 훗날 따지러온 지니에게 “우리, 기도하자”라고 다독거리다가 민망스런 보복의 제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옥탑방 고양이>부터 눈뜬 연기의 즐거움만 음미하고 있기에 최근 이현우의 일과는, 과거의 동지 귀차니스트들로부터 성토받아 마땅한 수준이다. 매일 SBSFM의 <뮤직라이브>를 진행하고, 의류사업과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를 운영하며 6월에 발표한 9집 앨범 <Sinful Seduction>의 전국투어가 연말로 잡혀 있다. 놀랍게도 10월4일부터는 <임성훈과 함께> 후속 아침 토크쇼를 진행한다. 사진 촬영을 위해 창가에 선 이현우는, 사교적인 섬 여의도의 야경과 썩 어울렸다. 우물의 깊이를 재기 위해 돌멩이를 던져넣는 기분으로 문답을 시작했다.

일의 가짓수가 많다. 갑자기 여러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한 건가.

오랫동안 굉장히 게으르게 살았다. 노동 자체를 싫어하는데 그렇다고 마구 논 것도 아니고 시간을 그냥 버렸다. 2, 3년 전 어느 날 친구들과 질펀히 술을 먹고 들어와 아침에 눈을 떴는데 시간이 예전에 느끼지 못한 스피드로 흘러가고 있더라. 남들은 내 나이를 알고 느끼는데 나만 모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기회가 주어지는 일들을 해보기로 했다. 예전엔 괜히 모험했다가 본전도 못 찾느니 이 상태로 늙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도전이 없으면 인생이 재미가 없다.

늘어난 일 때문에 포기한 부분은.

별것없다. 술이 많이 줄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술을 줄일 수가 없다. 사람들이 24시간 대기조로 안다.

<옥탑방 고양이>의 유동준 실장,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김지훈 실장은, 대중이 상상하는 자연인 이현우와 흡사한 남자였지만, <S 다이어리>의 신구현은 당신과 무관하게 캐릭터로서 존재하는 남자로 보인다. 어떤 판단으로 영화에 합류했나.

사실 영화 자체는 매력있었지만, 내 자리가 잘 보이지는 않았다. 서로 다른 나이대를 연기해야 하는데 내가 연기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준비단계에서 한두번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정이 들고, 그러다보니 발을 빼기가 어려워지고, 나중에는 “그럼, 요것만 좀 고쳐주라, 그럼 할게” 이런 식이 됐다. (웃음) 거절을 잘 못한다. 술자리 몇번 하면 사람들과 금세 친해져버린다.

거절을 못해서 하게 된 다른 일이 또 뭐가 있었나.

<옥탑방 고양이>도 ‘내가 실장을 꼭 해야지’, 별러서 한 게 아니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신문에 하는 걸로 기사가 나오기에 ‘음, 그럼 해야 하는 거군’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의 공동작업이 즐겁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현장은 어땠나? 심심해 보인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드라마보다 무척 섬세하더라.

오케이가 잘 안 났다는 말인가.

그렇긴 한데 나한텐 오케이가 잘 떨어지더라. 사실 나도 한번 더 하면 더 잘할 수 있는데 ‘얘는 뭐 한번 더 한다고 잘 나오겠어’ 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좀 상했다. (웃음) 그렇다고 다시 가자고 먼저 제안하기도 무안하고. 대본읽기부터 시청률 집계까지 얼마 안 걸리는 드라마가 주는 단기적 성취감에 비해 느렸지만, 재미있었다. 읽으려고 책을 갖고 가기도 했는데 집중이 안 되더라. 그런 데서 책을 읽고 있으면 가식적으로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고…. (웃음)

서울에 안 사는 걸로 안다. 얼마나 오래 한 동네에 살았나.

6년째 일산에 사는데 이사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마을에도 익숙해져야 하고 동네 슈퍼 아줌마하고 인간관계 쌓는 것만 해도 시간이 걸리잖나.

한집에 오래 살면 짐이 늘게 마련인데, 어떤 종류의 물건이 가장 많이 증식하나.

상가 안내책자. 한달에 몇권씩 다른 곳에서 발간되는데, 매번 궁금해서 집어온다. 이번엔 어떤 가게가 실렸나, 어디서 맛있는 음식을 하나, 그게 혼자 살다보면 굉장히 중요한 인포메이션이다.

사는 방식 자체가 스타성의 핵심인 특이한 경우다. 어찌 보면 남자가 사는 자연스런 방식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는데, 처음 그 점을 인식했을 때 어리둥절하지 않았나.

내 이미지가 왜곡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 좋게 포장된 면도 많다. 그렇지만 굳이 “이건 아닌데요. 이 부분은 제가 굉장히 깨거든요!”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묻는 사람도 없어서 쿨하게 잘사는 모양새가 됐다. 노총각 4인방(김현철, 윤상, 윤종신, 이현우)이라고 구질구질한 모임이 있었는데….

지금은 두분만 남은 걸로 안다.

남았다고 표현하면 별로 안 좋아한다. 두 사람이 안 가고 있다. 98년인가 다같이 가구 CF를 찍고 마치 우리가 이 시대의 멋진 솔로인 양 비쳐진 시절이 있었다. 그맘때 주부 프로그램에서 찾아왔기에 특별히 개인기도 없으니, 파스타를 라면 끓이듯 내놓았는데 그게 상당히 화면이 잘 받았다. 그런 프로 몇번 나가고 나니 마치 만날 파스타에 와인 마시며 오페라 틀어놓는 이미지가 돼버렸다. 사실 와인은 거의 안 마시고 폭탄주도 좋아한다.

한 오락프로에서 여러 여성과 서바이벌 데이트를 했다. 그 원조에 해당되는 외국 쇼에서 백만장자가 앉았던 자리에 당신이 캐스팅된 셈인데.

역시 거절을 못한 경우다. 프로듀서가 오래 알고 지낸, 같은 동네 사는 분인데 그런 쇼를 만든다고 하시기에 (말릴 순 없으니) “아, 그거 재미있겠네요” 했더니, ‘우리 현우가 해보면 어떨까? 듀오에도 알아봤지만 아무래도 현우가 해야 돼” 하시는 거다. 그래서 “하하하, 그래요? 왜 날… 뭐 재미있을 수도 있겠네요” 얼버무렸는데, 며칠 뒤 신문에 “이현우, 제주도에서 환상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기사가 났더라. “이게 내 인생이구나” 싶었다.

여자들이 그만큼 좋아하면 남자들이 거부감을 갖기 쉬운데, 실제로 많은 남자들이 이현우씨에게 부러움과 호감을 표하더라. 파벌을 초월한 교우관계 이야기도 했는데 본인에게 호감을 부르는 유전자 같은 게 있는 것 같지 않나.

물이 반쯤 든 내 컵을 보면 항상 사람들이 다 “물이 반씩이나 있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순한 생김새 때문인지 거부감이나 끈질긴 악의를 표하는 사람도 없었다. 친구들 모임 주도하는 일은 귀찮지 않은 걸 보면 내 신조는 귀차니즘이 아니라 베짱이즘인 것 같다.

취향과 신념이 다양한 다수에게 호감을 산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아무것도 요구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인터뷰를 통해 본 당신은- 시민정신이나 국민정서와는 다른- 사적인 원칙이 확실해 보이는데.

나의 편안함과 나의 원칙은 무관하지 않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폐끼치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기본의 연장이다.

“형광등 하나 갈아끼울 때도 전화해서 물어봐야 하는 현우에게”라는 카피를 대했을 때 느낌은.

도대체 이게 어떤 이미지인가 궁금했다. 사실 형광등 못 가는 남자가 있나. 광고주 얘기로는 굉장히 모성을 자극하는 멘트라고 했다. 내가 광고주가 아닌 이상 뭐라고 하겠는가. 사람들이 갖는 내 이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욕해도 괜찮다. 왜 못하나. 나도 TV보면서 만날 욕하는데.

DJ를 겸하는 음악인을 보면 창법과 화법을 비교하는 것이 재미있다. 연예계, 방송계의 속도와 당신의 속도는 잘 맞지 않을 것 같다.

충북 출신인 집안에서는 모든 일이 슬슬, 설렁설렁, 느긋했다. 이쪽 일 속도와는 상반된다. 그러나 내 일은 내 방식대로 하고 논란이 없는 한 흐름은 무시하면 된다. 데뷔 초에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감당 못할 페이스에 평정을 찾지 못했고 공백기를 가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람마다 본성과 맞는 나이가 있는 것 같다. 외연과 내용이 일치하는. 열일곱살에 빛나는 이가 있고 쉰살에 멋진 사람이 있다. 10여년 전의 당신은 불편해 보였다. 자신의 ‘적정연령’은 언제라고 보나.

지금이다. 30대 중·후반이 나와 일치한다. 이현우가 이현우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게 편하다. 어릴 때는 이현우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앞으로는 어찌될지 모르지만 이제 많은 일에 대처하는 법을 알기에 적어도 이현우로 사는 것이 불편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노래하다 연기하고, 모델하다 연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목숨 걸고 하는 일을 수월하게 하는 모습에 화가 난다”고 말할 수 있는 전업배우들의 입장이 있다. 한편 다른 입장의 이야기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한다. 연기하다 음악하는 사람도 잘되는 예를 못 봤다. 그런데 연기는 지금 TV나 영화가 필요로 하는 연기자의 폭이 매우 다양한 것 같다. 배우 수가 많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쓸 수도 있고, 원하는 캐릭터를 위해 노래하는 애, 마술하는 애, 길가는 아저씨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다 연기의 한 색깔일 수 있으니까.

카메라 앞에 서면 어떤 기분인가.

<옥탑방 고양이>가 16부작인데 10부쯤 되어 카메라에 익숙해졌다. 이현우로 살아온 시절들이 굉장히 힘들었기에 나로부터 일탈해 다른 사람으로서 행동하고 말하는 자체가 즐겁다. 타인의 영혼을 영원히 갖는 것이 아니라 잠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하지만 매니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극중 캐릭터가 본인과 똑같다는데.

하다못해 우리 엄마도 “왜 너만 연기를 안 하냐”고 하더라. (정색하고) 하지만 완전히 다른 영혼이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죽마고우들은 “야, 너 완전히 딴사람 됐어”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정말 <옥탑방 고양이> 찍고 나서 그 영혼에서 벗어나느라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제는 더이상 어린 여자를 사랑하고 도와줄 수 있는 실장일 수 없다는 현실에 부딪혀, 공황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좌중 웃느라 인터뷰 잠시 중단)

10월부터 아침 토크쇼 진행이라는 회사원적 생활에 뛰어들었다. 정확한 섭외의 변은.

제작진이 아침 토크쇼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보고 싶다고 했다. 아침 토크쇼는 주변에서 아저씨 이미지를 굳힐 수 있다고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모두들 득될 것이 없다고 하니, 내가 들어가 뭔가 새로운 방식으로 끌어갈 수 있음을 나와 남에게 증명하고 싶다. 방청객도 인위적 리액션도 없애고 조명, 대화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고 싶다.

드라마 <아일랜드>에 당신의 노래 <비가 와요> <허락하지 않은 사랑>이 삽입됐다. 그 드라마를 보나.

몇번 봤다. 일단 실장님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다.

화장하고 싶나, 묘를 쓰고 싶나.

유럽에서 널리 쓰이는 방식인데 자기 나무를 한 그루 정해서 그 아래 뼛가루를 묻는 거다. 나무가 일종의 묘비가 되고 무덤이 되는 거다. 어느 나무가 누구의 나무라는 걸 기록할 뿐이다. 산을 깎아야 세우는 납골당에 비해, 수백명이 한 나무 아래 묻힐 수 있고 뭔가 자라는 생명에 내 재를 주는 아이디어가 좋다.

즐거운 일은 일이 아니라고 오늘 누차 말했다. 그러나 연기, MC, 음악, 사업 모두가 보통 이상의 리스크가 있는 일이다. 잘 안 풀리면 순식간에 강요된 노동이 될 텐데.

(웃음) 간단히 말해서 <S 다이어리>가 개봉했는데 “쟤만 아니면 영화 재밌을 텐데”라고 지탄을 받으면 바로 노동이 되는 거겠지. 아직까지는 다행히 일의 결과들이 좋았다. 언젠가 큰 좌절을 겪어야 할 텐데, 단지 그게 <S 다이어리>는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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