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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 전성시대 [1]
사진 정진환이다혜 2004-10-15

<개그 콘서트> <웃찾사>와 같은 무규칙 이종코미디는 어떻게 시청자를 사로잡았나

신동엽도 없고 김용만도 없다. 개봉을 앞둔 영화의 스타급 주연배우도, 새로 음반을 발매한 유명가수도 없다. 다음날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할 스타급 연예인의 과거사 고백도, 그 어떤 애드리브도 없이 코미디언들이 꽉 짜여진 대본 연기를 능란하게 펼쳐 보인다.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일당을 받는 동원 방청객이 아니라 3주 전부터 인터넷으로 방청을 신청한 관객이다. 방청객들은 ‘깜찍이’의 몸동작 하나에, ‘블랑카’의 “사장님 나빠요” 한마디에 자지러진다.

댄스 대결, 짝짓기, 운동 경기와 미션 수행하기 등 MC나 게스트 할 것 없이 어느 채널에서나 똑같은 ‘그 밥에 그 나물’인 버라이어티쇼가 대세를 이루는 것 같던 한국 코미디 프로그램에 <개그 콘서트>란 별종이 ‘대박’을 친 뒤 한국 개그계에 퍼진 웃음 바이러스는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 전성시대를 낳았다.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 중흥의 역사를 쓴 KBS2TV의 <개그 콘서트>, 정통 스탠드업 코미디를 지향하는 KBS2TV <폭소클럽>, 개콘에 젖줄을 대고 있던 초창기의 모습을 탈피하고 이제 유사 프로그램 중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하 웃찾사).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란 장르는 이 세 프로그램들을 통해 어떻게 태어나고 자리잡았는가. 대한민국 코미디의 미래 기상도를 그려 보이는 데 이 프로그램들이 왜 중요한가. / 편집자

2004년 17일, 등촌동 SBS 공개홀, 오후 2시. 무대에서는 한가위 특집 <웃찾사> 드라이 리허설이 한창이다. 방송 녹화는 같은 날 오후 6시30분에 시작된다. 그런데 무대 위의 코미디언들은 대사를 아직 외우지 못했다. 동선도 엉망이다. PD가 관객석에서 대본을 뒤적이다가 소리친다. “야! 아직 대사 다 못 외웠어? 맛깔나게 좀 해봐! 그렇게 붙어 서 있지 말란 말이야! 저 구석 가서 니네끼리 연습 더 해. 다음!” 의상도, 조명도, 음악도 없이 진행되는 드라이 리허설 무대에서는 이른바 ‘스카우트’된 유명한 코미디언이건 신인이건 할 것 없이 모두 진땀을 빼며 PD의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맛깔나게’ ‘제대로’라는 모호한 수사에 따라 코미디언들은 “안녕하세요, 이기잡니∼다”라고 추임새를 넣고 이소라의 얼굴이 그려질 살 오른 배 위로 셔츠를 말아올린다. 무대 아래서는 깍듯하게 선후배 코미디언간의 위계가 지켜질지라도 무대 위에서는 ‘계급장 떼고’ 맞붙는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원조, 혹은 원조는 중요하지 않음

대개 스튜디오 녹화 형식으로 진행되던 기존 코미디 프로그램들과 달리 <개그 콘서트>는, ‘콘서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대 위에서 관객과 ‘맞장뜨는’ 방식의 코미디를 선보였다. 코너당 짧으면 30, 40초에서 <봉숭아학당>을 제외하곤 보통이 3, 4분짜리인 코너를 20개 가까이 묶고, 중간중간에 음악으로 ‘끊어가는’ 방식을 채택했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이름이 알려진 유명 코미디언들보다 무명에 가까운 코미디언들을 대거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지금은 친숙한 심현섭, 강성범, 박준형과 같은 코미디언들도 한동안 ‘맹구’, ‘수다맨’, ‘갈갈이’로만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성대모사를 하고 지하철 노선을 빼놓지 않고 달달 외우고 무를 갈며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이는 것도 모자라 애크러배틱한 코미디 연기를 선보였다. 재주넘기를 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사투리를 전략적으로 구사하고, 한국어로는 불가능해 보였던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코미디를 정착시켰다. 코너가 뜨고 퇴출당하는 것은 모두 방청객과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결정되었다. <개그 콘서트>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2002년 1월, 심현섭, 강성범, 박성호 등의 주요 멤버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대란’을 겪은 뒤에도 <개그 콘서트>가 30%가 넘는 시청률을 업고 ‘제3의 전성기’를 누린 것은 한두명의 스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버라이어티쇼와 달리 ‘발광’에 가까울 정도로 톡톡 튀는 신인들의 아이디어에 젖줄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유일한 규칙- 규칙없음

무대 위에서 코미디언이 관객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며 ‘웃기는’ 프로그램 방식은 미국과 일본에서 이미 코미디의 대명사처럼 자리잡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미국 NBC 네트워크를 대표하는 오락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스티브 마틴, 빌 머레이에서 빌리 크리스털, 애덤 샌들러에 이르기까지 내로라 하는 미국의 코미디언들이 이 무대에서 ‘원맨쇼’를 선보였다. 한국에서도 이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문제는 관객의 태도였다. 유명한 코미디언이건 그렇지 않건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로 깔깔거리고 ‘쉽게’ 웃는 미국 관객과 달리 한국 관객은 ‘썰렁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방식을 차용하는 것 자체에 무리가 있었다. 정통 코미디는 문화적 배경과 언어 유희를 활용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차용’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어난 것이 무규칙 이종 스탠드업 코미디이다. 모토는 ‘무조건 웃긴다’. 한명으로 불가능하다면 떼로 등장시킨다, 말로 웃길 수 없으면 타이즈를 입고 공중 곡예라도 한다. ‘한국형’이라는 뜻은 다름 아닌 ‘무규칙’ ‘이종’인 셈이다. 웃길 수 있다면 <9시뉴스>도 패러디하고, <슈퍼맨>도 희화화한다. 앞니가 튀어나왔으면 무를 갈고, 노래를 잘하면 남성 3중창단을 구성해서 노래로 웃긴다. ‘콘서트’의 방식을 차용한 <개그 콘서트>의 성공은 공개 녹화로 이루어지는 무대코미디라는 장르를 활성화시켰다.

‘규칙없음-웃길 수만 있다면’이라는 기이한 규칙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모두 미국식 오리지널 스탠드업 코미디와 구분된다. 특히 내용 면에서의 차이는 이 장르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측면이다. <폭소 클럽>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블랑카의 뭡니까 이게’가 희화화하는 대상은 ‘우리’다. 유명 정치인도 아니고 스캔들을 일으킨 스타도 아닌 익명의 ‘사장님’과 ‘봉숙이’가 한국에서 일하는 동남아시아 근로자 블랑카의 (한바탕 욕이 아닌) ‘원망’의 타깃이다. 코미디언 정철규는 3년간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했던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블랑카 캐릭터를 만들었다.

탕수육을 먹고 싶은 블랑카는 자장면을 먹을 것을 강권하는 사장님의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블랑카는 지하철의 치한이 아가씨 뒤에 딱 붙어 서서 “하~하~” 하며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면 “어디가 많이 아픈가보다”라고 생각한다. 블랑카는 원망한다. “사장님 나빠요”, “아저씨 나빠요”. 그 어눌한 말투 때문에 사람들은 자지러지지만, 웃는 사람들은 그 원망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릎을 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가위 특집 방송을 앞둔 <웃찾사> 무대에서도 ‘세계적’이 아닌, ‘신토불이’ 코미디가 대세다. 차례상을 차리면서 ‘홍동백서’를 맞추는 코미디언들의 대화가 ‘홍길동전’, ‘홍실청실’, ‘홍콩할매’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 외에 또 어디 있겠는가. <웃찾사>의 박재연 PD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한국 코미디가 최강”이라고 단언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것은 그래서이다.

한국의 기타노 다케시, 우디 앨런을 기다린다

코미디는 유행어를 낳고, 유행어는 코미디를 부흥시킨다. 하지만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의 강점은 ‘걸쭉한 입담’만으로 승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에는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토대로 해서만 웃을 수 있는 슬랩스틱과 시사풍자, 말장난이 모두 꽉 짜여져 있다. 그리고 이 무대 위에 신인들이 끝없이 등장한다. 신인 코미디언이 자기 코너를 갖고 일정 시간을 독점할 수 있는 유일한 무대는 이런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뿐이다. 이들은 정통 코미디를 부활시키고, 외도만 하는 코미디언을 제자리로 세운 한국 코미디의 주역일 뿐 아니라 제2의 신동엽, 제2의 강성범이 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기타노 다케시, 우디 앨런으로 성장해나갈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조폭을 등장시키지 않고도 그저 배꼽빠지게 시원하게 웃겨줄 코미디영화의 등장도 기대해본다.

다시 둔촌동 SBS 공개홀, 이제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었다. 카메라 리허설이 진행 중인 코미디언들에게서는 한 시간 전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한가위 특집의 게스트 중에는 ‘안 좋은 추억’의 정준하와 ‘맹구’ 심현섭이 포함되어 있다. 타 방송의 히트 코너를 카피하는 것은 ‘반칙’ 아니냐고? 이곳은 웃길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 코미디언들이 102%의 땀과 날밤 새는 연습으로 무장한 대한민국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이다. 글쎄, 일단 웃겨드린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