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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포증을 앓는 기자의 한숨
이영진 2004-10-15

난 영어공포증을 앓고 있다. 세계화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서 대학 시절을 보낸 토익 세대지만, 파란 눈의 외국인을 만나 내가 자신있게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라곤 ‘헬로’(hello)가 전부다. 아, 생각해보니 ‘소리’(sorry)도 있다. 거짓말이 아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취재원이 자신의 친구라며 이탈리아 출신 미국인을 소개한 적 있다. 이름이 톰이었는지 존이었는지 마이클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훤칠한 체구의 남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당시 또 한명의 한국인 친구를 사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소개받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난 말을 걸까봐 무정하게도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설사가 나서 화장실 찾느라 혈안이 된 사람처럼. 그 일이 있은 뒤로 한동안 그 취재원에겐 전화를 안 했다. 쪽팔려서.

<씨네21>은 해외 출장이 잦은 편이다. 내 병을 아는 친구들은 어떻게 월급 받고 살고 있느냐고 걱정스럽게 묻는다. 국내 출장은 두말 않고 나서지만 해외 출장은 두손 들고 물러서는 후배를 이해해준 <씨네21> 선배들이 아니었다면 퇴출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선배들이 나를 머나먼 이국 땅으로 자꾸 내몰기 시작했다. 배려를 해줘봤자 영어공포증을 키우기만 할 뿐이라는 판단 때문인 듯하다. 어쨌든 해외 출장에 나서면서부터 난 몇 가지 복안을 마련해야 했다. 옆에 앉은 외국인이 말을 걸지 못하도록 비행기에 오르면 곧바로 수면을 취할 것, 되도록 영어에 능통한 사진기자와 동행할 것, 공개적인 자리에선 미소를 짓되 과묵을 유지할 것 등등.

이런 작전은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마다 성공을 거뒀다. 돌아오면 혀가 굳고, 머리가 굳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몇번 계속되고 나니 견딜 만했다. 나름의 생존 노하우가 생겼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석달 전 있었던 술자리에서 큰 실수를 했다. 베니스영화제에 가겠느냐는 선배들의 질문에 “가지, 뭐” 했던 것이다. 다음날 술이 깼을 때 후회가 밀려왔지만, 어제 했던 말은 취중허언이었다면서 한발 빼기엔 사무실에 후배들이 너무 많았다. 정면돌파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고, 이때부터선 조력자를 구하는 데 집중했다. 현지에 한국인 유학생이 별로 없었으므로, 난 영어 잘하는 <씨네21> 후배를 포섭해 그와 교신을 하기로 했다. 매일 계속되는 기자회견 내용을 녹음해서 파일로 보내면, 한국에서 후배가 번역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영어 공부 좀 해둘 걸 하는 후회는 현지에서 배가 됐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감독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을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한국영화를 좋아한다는 이탈리아 기자에게 어떤 답도 해주지 못하면서 순간 어떤 권리도, 발언도 행하지 못하는 금치산자가 된 듯한 비참함이 들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일도 떠올랐다. <오사마>의 감독인 세디그 바르막은 마지막 장면을 찍던 날을 떠올려달라는 질문에 답하다 말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영어통역을 자원했던 후배 또한 닭똥 같은 눈물을 떨궜지만 난 “물이나 한잔 더 하시겠느냐고 좀 물어봐라”라고 했을 뿐이다. 말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한껏 맛본 지금 난 아무리 만취해 집에 들어가도 CNN을 켜놓고 잔다. 무슨 뜻인지는 그림을 보면서 대강 이해할 따름이지만 말이다. 아침에 깨어나면 꿈에서 꼬부랑 말을 씨부렁거린 탓인지 요즘 며칠동안 입이 아프다.

이영진 anti@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