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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형>에서 박정희 숭배의 이데올로기를 발견하다

내 친구는 자기 애인을 “우리형”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에게 ‘우리형’은 묘한 성적 뉘앙스를 가지는 단어다. 더구나 주인공이 선남선남, 원빈과 신하균 커플이라니,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형제애”라는 영화 카피를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동성애”로 오독할 뻔했다.

영화 속 형제의 애정행각이 장난이 아니다. 터프가이 동생 종현(원빈)과 모범생 형 성현(신하균)의 캐릭터는 야오이 만화의 주먹질 잘하는 매력남 ‘공’과 공부 잘하는 연약남 ‘수’의 이미지를 닮았다. 내러티브도 야오이의 공식을 따른다. 둘은 처음에는 티격태격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확인한다. <우리형>은 영화의 전반부는 애인을, 후반부는 엄마를 두고 사랑싸움을 벌이지만, 형제를 갈라놓은 죽음 앞에서 결국 형을 사랑했음을 뒤늦게 깨닫는 동생의 가슴 아픈 멜로드라마다. 그래서 영화 <우리형>의 성 정체성은 바이섹슈얼, 뭐 그쯤 된다.

무심하지만 다정한 터프가이의 매력

애정행각의 방식 또한 터프하다. 피를 나눈 형제여서인지 피를 흘려야만 형제애를 확인한다. 동생이 맞장뜨다가 졸라 맞으면 형이 벽돌로 놈을 내려찍고, 형이 ‘언청이’라고 놀림을 당하면 동생이 홀연히 나타나 수습한다. 엄마마저 사고 친 아들들에게 “다음에도 누가 느그 한 사람이라도 괴롭히만 같이 때려주라. 그게 형제다”라고 훈계한다. 무서운 훈계다. 오직 우리는 가족 안에서만 인간이 되면 된다. 일수놀이를 하는 엄마도, 주먹질을 하는 아들도 가족 울타리를 벗어나면 짐승이 되지만, 다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또 학교에는 깡패밖에 없다. 학생도 깡패고, 선생도 깡패다. 학교는 그렇게 낭만화된다. 마침내 동생은 형을 위해 깡패가 되고, 형은 동생의 죽음마저 대신한다.

이러니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형제는 용감했다”는 말을 가슴속에 고이고이 새기게 된다. 그러고보니, 내가 진정한 남자가 되지 못한 것은 다 형제가 없었던 탓이다. <우리형>의 원빈 오빠처럼 바보 같은 형 하나만 있었어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동건이 형처럼 심약한 동생 하나만 있었어도 나도 분명 진정한 남자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게다.

마초가 되지 못한 억울함을 마초를 흠모하는 일로 풀기로 했다. 그래서 ‘마사회’ 회원이 됐다. 마사회는 ‘마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약자다. 지탄받아 마땅한 취향을 가진 마사회 회원들은 신변의 안전, 아니 사회적 지위와 체면의 보존을 위해 모임을 점조직으로 운영하고 있다. 어쩌다 이 따위 취향을 가지게 되었는지, 곰곰이 반성해본 적도 있다. 그때 홀연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단어는 ‘가부장의 그늘’이었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지만 속 깊은 연민을 품고 있는, 선한 가부장, 그 가부장의 쓸쓸한 그늘은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지녔다. 원빈이 연기하는 종현에게는 선한 가부장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있다.

양아치 혹은 조폭, 가부장의 다른 이름

일단 깡다구가 세다. 종현이 “존나”, “씹새끼야”, “쪼가리” 같은 욕지거리를 뱉을 때마다 그의 매력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물론 사나이의 언어, 부산 사투리로 욕을 하니 금상첨화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그는 고독하다. 그가 가슴을 풀어헤치고 주먹을 휘두를수록 고독은 깊어간다(근데 배경은 옛날인데, 원빈은 왜 후줄근한 러닝이 아니라 딱 붙는 쫄티를 입고 나오냐?). 그럼에도 그가 가족을 위해 깡패가 될 때, 악행은 너그러이 이해받을 것이 된다.

마침내 그 멋진 원빈이 성난 눈빛으로 이웃의 가게를 때려부수고, 정신장애를 가진 친구를 발길질로 짓이길 때, 그의 매력은 무아지경으로 치달아 마침내 폭발한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 된다. 하지만 우리의 선한 가부장은 형의 등록금을 위해 잠시 ‘외도’를 하지만 이내 ‘집으로’ 돌아온다. 깡패짓을 나무라는 형에게 한마디 변명도 없이. 그리하여 선한 가부장의 또 다른 이름인 반듯한 양아치, 의리있는 조폭은 우리 시대의 이상형으로 미화된다.

무릇 가부장에게는 보살필 존재가 필요한 법이다. 공부를 잘해 가족의 희망이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먹물은 가부장이 마땅히 보살펴야 할 연약한 존재다. 철모르는 먹물과 보살피는 주먹의 조합은 어느새 한국영화의 흥행 보증수표가 됐다. 이런 구도는 <우리형> <태극기 휘날리며> 등에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다. 당장 밥도 안 되는 글 따위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종현, 성현 형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항도여상 퀸카 조미령(이보영)이 성현의 먹물 대신 종현의 주먹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동생은 형의 일기장에서 훔친 시로 퀸카의 환심을 사지만, 영화는 형의 질투심을 나무랄 뿐 동생의 도둑질을 폭로하지 않는다. 구도는 <시라노>에서 빌려왔지만, 귀결은 전혀 다른다. <시라노>에서는 사랑받는 여인이 자신이 받은 연애편지가 잘생긴 크리티앙의 것이 아니라 못생긴 시라노의 것임을 알게 되지만, <우리형>에서는 그런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문약한 형을 위해 사랑마저 버리는 깡다구 동생이 아름다울 뿐이다.

선한 가부장, 종현의 매력은 형이 “제발 한번만 형이라고 불러도”라고 보채는 장면에 응집돼 있다. 종현은 대답 대신 그저 “입어라, 쌀쌀하다”고 한마디 내뱉는다. 형이 추울까봐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어주면서. 이처럼 종현의 겉모습은 무심하지만, 속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하다. 한국사회가 권해온 전통적인 남성상이다. 종현은 어찌나 매력이 넘치는지 엄마조차 “남편 같았다”고 오버한다. 우리 모두 어찌 종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형>의 흥행이 한국사회의 마초사랑을 증명한다.

그를 보면 ‘그때 그 사람’이 생각난다

종현을 보면서 박정희를 떠올렸다. 선한 가부장의 이미지는 좋은 독재자의 이미지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형>은 가부장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결국은 가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이 논리는 아무리 인권탄압을 했어도 다 경제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독재자 정당화 논리를 연상케 한다. 한국의 국가는 유사 가족이다. 비록 인혁당 인사들을 사형시켰지만, 장모님의 생신날에는 <으악새>를 부르며 눈물짓던 독재자는 그런 심리적 기반 위에서 복권된다. 가족을 미화하고, 마초를 찬양하는 영화들의 언어는 왜 하필이면 경상도 사투리인가.

물론 <우리형>에는 소소한 재미들이 적당히 배치돼 있다. 미령이 읊어대는 자작시 <아스피린>은 촌철살인의 웃음을 자아낸다. “생리통이 심해 씹었다네. 아스피린/ 그 쌉쌀한 맛 속에 숨어 있는/ 여자의 숙명…”. 하지만 종현의 달콤한 매력에 빠지기에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가 씁쓸하다.

추신. R.ef가 부른 추억의 명곡 <이별공식>의 가사는 이랬다. “왜 이별장면에선 항상 비가 오지. 열대우림 기후 속에 살고 있나.” <친구>와 그 맥을 잇는 <우리형> 버전으로 ‘노가바’(노래가사 바꿔부르기)를 하면 이렇게 된다. “왜 살인장면에선 항상 비가 오지. 열대우림 기후 속에 살고 있나.” 비오는 날의 피칠갑은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마니 무따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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