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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만점 라디오 프로그램 넷, 스튜디오 탐방기 [1]
박혜명 2004-11-08

오직 소리로만 소통하기. 사연을 보내고 그림엽서를 띄워도, 라디오는 우리가 귀로 만나는 매체다. 그래서 매일 라디오를 듣는다는 건, 매일 밤을 이어가는 연인 또는 친구와의 긴 통화를 닮아 있다. 들려주는 이야기와 음악이 내 마음을 풍부히 부풀려놓는 것. 한쪽 귀에 가까이 두고 그 말투와 음색에 익숙해지는 것. 매일 비슷한 시간, 같은 목소리를 다시 듣지 않으면 궁금하고 허전해서 견딜 수 없는 버릇이 생겨버리는 것. 새벽이 오는 것도 잊게 만드는 그 통화가 우정이나 사랑을 키우는 것처럼, 청취자들은 그들만의 라디오 프로그램과 일기장 같은 관계를 키워간다.

어떤 면에서 그 관계는 청취자들이 DJ와 저마다 쌓는 우정이기도 하다. 그들은 DJ의 목소리를 매일같이 듣고, 말투에 익숙해지고, 스타일에 길들여진다. “라디오는 DJ의 몫이 80%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태생부터 지금까지 (개인 사정으로 2년 정도 자릴 비웠던 것을 빼면) 함께해온 김경옥 작가는,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이야기했다. 80%라는 수치가 정확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최소한 그만큼은 DJ의 색깔로 꽉 채워져 있고 애청자들도 그 색깔대로 존재하는 라디오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MBC-FM <배철수의 음악캠프>와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 KBS-FM <전영혁의 음악세계>와 SBS-FM <남궁연의 고릴라디오>. 각각 아저씨, 마왕, 선생님, 형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DJ들이 그들만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곳.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방송사에, 용감하게도 도깨비처럼 연락해서 번개처럼 약속을 잡았다. 이 네개의 스튜디오를 들락거린 지난 이틀은, 극과 극의 체험이자 잊지 못할 견학이 돼버렸다. 나의 뇌가 목소리로만 기억해온 어떤 존재가 “안녕하세요”라고, 그 친숙한 목소리에 눈짓까지 더해 건네는 첫인사. 실은 그때가 매번 가장 가슴 떨린 순간이었다.

글 박혜명 tuna@cine21.com

아날로그적 친밀함, 언제나 그자리에

단골 음반가게 ‘아저씨’가 기다리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MBC FM4U(91.9.MHz) 매일 18:00~20:00

오후 다섯시. 은행 금고문만큼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간 생방송 스튜디오 안에서 맑은 파란색 스웨터에 탁한 카키색 재킷을 걸치고 앉은 DJ 배철수를 만났다. 10년은 된 단골 음반가게 같은 프로그램. 얘긴 많이 안 해봤어도 그냥 정이 가는 주인아저씨 같은 DJ. 십대 시절에 팝과 록으로부터 음악을 배워간 사람들에게, 올해로 15년째에 접어든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가장 대중적인 눈높이에서 ‘내 인생의 팝송’을 남겨준 음반가게다.

딱히 심심하지도, 그닥 화려하지도 않다. 80년대 후반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팝 전문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음악 소개에 충실하기 위해 짜여진 소박한 구성. 김경옥 작가는 “우린 내놓는 상품이 별로 없다. 게스트도 별로 없고, 그나마 있는 게스트도 한번 나오면 장기집권한다. (웃음) 친숙함. 때려치우고 갈아엎는 것보다 주야장천 같은 상품으로 내놓으니까 그게 좋은 사람은 계속 쓰고, 떠난 사람도 생각나서 다시 오면 그대로 있어서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개성을 간명히 정의해준 김경옥 작가 역시 이 방송의 출생 때부터 변하지 않은, 여전히 손으로 쓴 원고를 DJ에게 넘기는, ‘주야장천 같은 상품’의 일부다.

‘나도 애청자’란 생각과 직업적 자의식 사이에서 DJ에 대한 호칭을 고민하는 동안, 음악작가가 그의 앞에 30여장의 신청곡 CD를 올려다놓고 간다. 선곡을 미리 하지 않느냐고 묻자 DJ가 종이 한장을 들어보인다. 그날 방송될 곡들의 리스트가 적혀 있어야 할, 그러나 텅 빈 큐시트다. 오프닝곡을 비롯해 곡목록과 순서를 정해놓지 않는 방식은, 1990년 3월19일 첫 방송부터 15년간 DJ가 보관해온 또 하나의 신선요소다. 그는 디지털DB 시스템이 갖춰진 스튜디오 안에서 컴퓨터로 음악파일을 찾지 않고 굳이 CD로 틀어주는 스타일도 고집한다. 한결같은 아날로그식 DJ. 또 한결같은 아날로그식 작가. 태어날 때의 얼굴이 열다섯살이 되어도 크게 변하지 않은, 언제든 다가가기 편안한 프로그램. 존경하는 DJ 아저씨를 ‘배철수’라 끊어 표현하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이 애정의 근원이 바로 변질되지 않은 아날로그적 친밀함이었음을, 이날에야 알았다.

방송실 바깥 의자에 앉아 생방송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며 바라본 전자시계가 정확히 06:00을 그렸다. 학생 시절의 교가만큼 익숙한 시그널 뮤직이 흘러나오고, 15년을 하루 같게 만드는 DJ 아저씨의 목소리가 눈앞에서 열렸다.

배철수 인터뷰

“매일 들어도 지루하지 않게, 어쩌다 들어도 낯설지 않게”

10주년을 맞이하기 전 어떤 인터뷰에서 10년까지는 채우고 싶지만 그 이후는 모르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벌써 15년째다.

내년 3월이면 만 15년이다. 10년 하고 쉬고 싶었는데, 인생이란 게 생각대로 안 되는 거잖나.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행복하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좀 놀고 싶을 때도 있다. 이 일을 하면서 한번도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다. (웃음)

개인적으로 이 프로그램에 대한 첫 기억은 여기서 퀸의 <Don’t Stop Me Now>를 틀어줬을 때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데, 그때 그 음악을 듣고 그런 대단한 그룹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공테이프에 녹음해서 수십번 듣고 LP도 사면서 많은 것들을 알기 시작했다. 그런 식의 기억을 떠올리는 청취자들이 또 있지 않았겠나.

최소한 팝송을 좋아하고 라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이래저래 얽힌 추억들이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기억 잘 안 한다. 방송은 매일매일 하는 거다. 라디오 프로그램이라는 게 기획을 한다고는 해도 DJ가 얘기하고 음악 들려주는 거 외엔 없다. 정말 단조로운 작업이다. 그러니까 오늘 방송한 얘기도 오늘 지나면 잊어버린다. 다음날이 되면 기억이 안 난다.

김경옥 작가와 한결같이 일해왔다.

아주 훌륭한 작가다. 작가가 미국 갔을 때랑 아기 낳았을 때 빼고 죽 같이 일했다. 그분이 글을 이상하게 써온다거나 내 생각과 다른 글을 쓴다면 일을 못한다. 그분이 자리를 비웠을 때 다른 작가하고도 일을 했는데 그땐, 원고를 참 많이 고쳤다. 말투도 입에 안 맞아서 고치게 되고. 근데 김경옥 작가 원고는 토씨 하나 안 고치고 그대로 읽어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때마다 연말·연초 기획이니, 뮤지션 기획이니, 장르 기획이니 온갖 기획을 할 텐데, 이젠 15년쯤 되어서 아이템을 새로 짜내는 것도 좀 힘들지 않나.

방송이 365일 매일 나가면, 그걸 매일 듣는 사람이 있고 일주일에 반 정도 듣는 사람이 있고 어쩌다 한번 채널이 걸려서 듣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정한 캐치프레이즈는, ‘매일 듣는 사람도 지루하지 않게, 어쩌다 듣는 사람도 낯설지 않게’다. 그나마 팝음악의 역사가 굉장히 오래됐고 그만큼 소프트웨어가 풍부하다. 같은 뮤지션의 곡도 우리는 남들이 잘 안 내보내는 곡을 들려주자는 거다. (잠시 간격을 놓고) 음악은 그걸로 되는데, 얘기가 문제다. 똑같은 놈이 똑같은 생각을 말하고 있으니까. (웃음) 얘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에는 얘기도 가급적 안 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그럼 거짓말은 하면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