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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불륜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주홍글씨>

<주홍글씨>의 주인공들은 횡설수설하고, 영화는 갈팡질팡한다. 영화는 혼란스럽지만, 단지 영화 탓만은 아니다. 불륜에 대한 우리의 말이 횡설수설하고, 마음이 갈팡질팡하기 때문이다. 불륜에 대한 이 시대의 태도는 엉거주춤하다. 인정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으니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다. <주홍글씨>는 사랑과 결혼 사이에서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못하고 헤맨다. 그런 면에서 <주홍글씨>의 오락가락에는 리얼리티가 살아 있다. 영화는 쿨하지 않으면서 쿨한 척하는 시대를, 겉 다르고 속 다른 이 시대의 속물들을 까발린다.

비밀을 폭로하는 순간, 파국은 닥친다

어쩌면 우리는 ‘묻지 마’ 관광 중이다. 불행은 의심에서 시작된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는 순간, 파국은 들이닥친다. 형사 기훈(한석규)은 아내 수현(엄지원)과 애인 가희(이은주) 사이에서 유능하고 행복하다. 사진관 여자 경희(성현아)도 여느 부부처럼 남편과 “문제가 있어도 괜찮은 척”하면서 살고 있다. 의심은 우연히 시작된다. 어느 날 들은 (간호사의) 말 한마디(“이번에도 중절하면 어려워져요”), 우연히 본 사진 몇장(경희야 사랑해)이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파국을 몰고 온다. 침묵의 카르텔은 한동안 불안한 평화를 유지한다. 기훈은 수현의 낙태를 의심하지만 묻지 않는다. 수현은 기훈과 가희의 불륜을 알지만 추궁하지 않는다. 가희는 수현의 과거에 대해 기훈에게 말하지 않는다. 침묵의 카르텔이 깨지는 순간, “빠체”(평화)는 깨진다. 역시 모르는 게 약이다. 의심이 들끓어도 침묵할지어다. 우리 시대의 교훈이다.

비밀이 있는 자, 입이 근질근질하게 마련이다. 입이 근질근질해도 잃을 것이 있으면 침묵을 지킨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더욱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려는 순간, 폭로는 시작된다. 폭로는 언제나 약자의 무기다. 어리석게도 관계에서 쫓겨나는 자는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임신한 가희는 “나 4주 됐어”라고 기훈을 다그치고, 수현은 가희의 집에서 기훈을 만남으로써 둘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폭로한다. 수현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들은 기훈은 가희에게 “나 너한테 할말 있다”고 말한다. 임박한 이별의 통고 앞에서 가희는 마지막 폭로를 터뜨린다. 그리고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불륜과 일부일처제 사이의 갈등

<주홍글씨>는 사랑과 우정이 아니라, 사랑과 결혼 사이에서 헤맨다. 정확히는 낭만적 사랑과 일부일처제 사이에서 방황한다. 영화는 불륜이야말로 이 시대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불륜이나 동성애쯤 돼야 낭만과 조우하고, 주홍글씨가 새겨진다. 기훈과 가희의 불륜은 낭만적 사랑을 상징한다. <주홍글씨>는 기훈과 가희의 불륜을 통해 치고 박고 싸우다가도 울면서 섹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섹스의 절정에서 “너무 사랑해”라고 울부짖는 것이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불륜의 로맨스를 위해 유행가 가사 같은 대사도 거침없이 쏟아낸다. “형 같은 아들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을 놓고 가세요”. (영화는 진짜 마음을 놓고 가는 ‘강수’를 둔다). 이 모든 것이 슬프고도 애잔한 사랑의 찬가처럼 들린다.

<주홍글씨>는 일부일처제(모노가미)가 무너지고 있음도 부인하지 않는다. 사진과 여주인, 경희의 입을 빌려 결혼에 대한 상투적이지만 절절한 진실을 뱉어놓는다. 경희는 기훈에게 “형사님은 같이 사는 사람이 끔찍한 적 없으세요? 그렇게 5년을 살았는데 이건 아니에요”라고 묻고 또 묻는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일부일처제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콩나물’로 봉합하려 하지만, 아무리 싱싱한 콩나물도 균열을 묶어세우지는 못한다.

<주홍글씨>에서 임신은 몰락하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유일한 끈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임신 콤플렉스를 드러낸다. 경희의 상습적인 낙태는 결혼에 대한 거부를 상징하고, 끝끝내 임신을 거부하는 그녀는 남편을 죽인다. 예전에 낙태했으나 임신을 받아들이는 수현의 선택은 그녀가 과거에서 벗어나 가족제도 안에 안착했음을 상징한다. 가희는 임신을 하자 불륜을 참지 못하고, 기훈에게 매달린다. 가희의 유산은 스스로의 파국을 불러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결국 임신이라는 신성한 책임 앞에 주인공들은 머리를 조아린다. <주홍글씨>의 임신에 대한 강박은 유치해 보이지만, 유치한 현실의 반영이다.

결혼이 소멸되는 시대의 위기를 드러내다

<주홍글씨>는 결혼제도의 허상을 폭로하지만, 그래도 불륜만은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얽히고 설킨 3각 관계에서 퇴장해야 할 사람은 가희다. 그는 결혼제도 바깥에 존재하는, 결혼제도의 위협자이기 때문이다. 가희는 기훈과 수현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낭만적 사랑의 공주지만, 결혼제도에서는 패자인 것이다. <주홍글씨>는 사랑과 가족제도 사이에서 오랜 방황을 거듭하다 결국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지독한 죄의식을 품은 채. 그것은 영화이자, 현실이다.

<주홍글씨>의 혼란은 기훈의 심리에 투영된다. 기훈은 쿨한 척하지만 갈수록 죄의식에 시달린다. 기훈은 애인에게조차 “(아내인) 수현이한테 불만있어서 너를 만나는 건 아니다”, “수현이를 사랑한다”고 쿨한 척하지만, 결국은 만취한 채 가희의 문을 두드리면서 “나도 쉽지가 않아요. 니가 그렇게 원하는 반지 하나 못해주고, 수현이는 나 몰래 애 뗐다 그러고”라고 토로한다. 우리 시대의 불륜남녀가 아무리 쿨한 척해도 죄의식의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 초반에 자신만만했던 기훈은 갈수록 자신감을 잃고 결국 트렁크 안에서 분열한다. 트렁크 안의 기훈은 가희에 대한 집착과 원망 사이를 어지럽게 헤맨다. “이 씨팔년아”, “다 너 때문이야”라고 외치다가, “죽지 마. 내가 잘못했어”라고 애원한다. 돌아갈 가족이 없는 가희는 끝끝내 낭만적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주홍글씨>는 욕망의 반대편에 서지만, 잔인하게 낭만적 사랑의 숨을 조르지도 못한다. 온전한 회개에 이르지도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경희는 “사랑했다면 괜찮나요?”고 묻는다. 기훈은 대답하지 못한다. 잠시 뒤 “악몽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내레이션만이 흐른다. <주홍글씨>는 인생 자체가 욕망으로 얼룩진 악몽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악몽은 혼란에서 온다. 낡은 것은 사라졌으나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때가 바로 위기다. 그람시가 남긴 말이다. 일부일처제는 (사실상) 사라져가고 있으나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은 열리지 않았을 때, 그때가 바로 파국의 위기다. <주홍글씨>는 그 위기의 징후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추신. ‘동성연애’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관객은 아니나 다를까 “에이~”, “체” 하면서 혀를 끌끌 차거나 짜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의 호모포비아를 커밍아웃한 것이다. ‘동성연애’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반응이다. 그들의 짜증스러운 반응에 짜증이 난다. 동성애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보다 ‘동성연애’에 대한 시각적 반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몸의 반응, 그것이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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