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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한 나라의 앨리스
2001-02-02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

<…앨리스>는 상처 입은 소녀의 이야기다. 다들 자고 있던 한밤중 집에 불이 난다. 미처 부모님을 깨우지 못한 앨리스는 혼자 살아남았다. 목숨은 구했지만 영혼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정신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앨리스 늦었어, 빨리 따라와.”

서두르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흰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간다. 초록색 잔디와 파란 하늘은 사라지고 검은 죽음의 땅은 끝모를 어둠으로 덮여 있다. 이곳은 동화 속 이상한 나라다. 하지만 왜 이런 모습인지는 모른다. 의지할 수 있는 건 자기를 불러들인 토끼뿐이다. 하지만 시계를 보면서 “늦었다”고 외치던 토끼는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앨리스는 혼자서 길고 험한 여행을 시작한다. 동그란 피터팬 칼라에 부풀린 소매, 하얀 에이프런은 어느새 피로 물든다. 앨리스의 장난감은 식칼이다. 토끼를 계속 쫓아가기 위해선 식칼을 휘둘러 길을 가로막는 건 뭐든 해치워야 한다. 소녀는 까마득한 구름다리를 건너가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길을 찾고, 끓어 오르는 용암 위 낭떠러지를 뛰어넘는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광기어린 세계다. 아이들은 머리 위쪽을 도려내고 교정 장치를 단 채 기계에서 생산된다. 노예가 된 사람들은 쉬지 않고 짐을 날라야 한다.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다. 미친 모자장수는 다른 생명체를 기껏 실험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고, 체스나라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색깔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죽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모든 뒤틀림을 만든 건 하트의 여왕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저놈의 목을 베라”고 외치는 여왕의 얼굴은 바로 앨리스다. 이 세계를 이렇게 만든 건 자기 자신이다.

소녀의 상처는 크고 깊다. 그리고 나날이 더 커진다. 하지만 아무도 볼 수 없다. 사람들은 쉴새없이 남을 상처입히지만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할 수는 없다. 혼자 감당하면서 소녀는 상처를 스스로 할퀸다. 더이상 다른 상처를 입지 않겠다는 마음은 이미 입은 상처를 더욱 크고 깊게 한다. 소녀는 마음속 지옥에서 괴물을 키운다. 괴물은 소녀의 닫힌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자기 완결적인 그로테스크한 세계는 점점 견고해진다.

피묻은 식칼을 휘두르는 앨리스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공생의 고리를 깬다. 스스로의 상처 속으로 깊이 더 깊이 움츠러들어가는 걸 중단한다. 이 세계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스스로를 쓰러뜨린다. 이제 세계는 다시 평화스러워지고 모든 이들은 행복하게 어깨를 걸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동화책의 마지막 장이 펼쳐진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디 엔드.’

앨리스는 활짝 웃으면서 정신병원의 문을 빠져나간다. 하지만 소녀는 정말 구원받은 것일까? 이상한 나라에서 본 뒤틀리고 고통받는 영혼들은 앨리스가 스스로 만든 것들이지만 무에서 나온 건 아니다. 소녀가 보고 듣고 만나는 많은 장면들은 스스로 상처받았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다른 사람의 상처들이다. 소녀는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볼 수 없다.

지금부터 앨리스는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다시 상처 입을 것이다. 마음속의 지옥은 사라졌지만 정신병원 밖에는 또다른 지옥이 있다. 이곳에는 불을 뿜는 몬스터나 흰 토끼를 짓밟는 모자장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 소녀가 식칼 한 자루로 바꿔놓을 수는 없는 곳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