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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라고 우기는 사회
김도훈 2004-12-17

(이 글에는 ‘스포일러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는 치명적인 설사, 복통을 유발할 수도 있는 스포일러가 잔뜩 있습니다.)

스포일러(spoiler)는 ‘영화의 결말이나 반전에 관련된 정보를 미리 흘려서 영화관람의 즐거움을 떨어뜨리는 사람/글’을 의미하는 용어다. 한글 애호가들이라면 이 단어를 뭐라고 바꿔 불렀을까. 영화지뢰? 반전폭탄? 그렇다. 스포일러는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지뢰다. 게다가 천지에 널렸다. 일요일 아침 영화정보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무심코 밟고, 인터넷의 영화게시판을 서핑하다가도 밟는다. 밟으면 달아날 길도 없고 파괴력도 무시무시하다(이건 정말, 당해본 사람만 알 수 있다). 다행히 지난 10년간 스포일러의 부작용에 대한 사회적 환기가 시작되면서 지뢰 매설은 좀 수그러들었다. 매체들은 저마다 ‘스포일러 주의’ 경구를 달고서 독자들을 안심시키고, 관객은 ‘침묵서약’을 통해서 서로를 배려한다.

하지만 강력한 스포일러 민감증은 또 다른 오해를 낳기 시작했다. 굳이 스포일러에 포함시킬 수 없는 플롯의 공개마저 민감한 지뢰제거반에 의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극도의 민감성 스포일러 증후군이라고 불릴 만한 이같은 현상은 다양한 인터넷 게시판들에서 주로 눈에 띈다. 누군가는 “<트로이>에서 헥토르가 죽는 것을 밝히다니. 그건 스포일러”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이건 글쓴이의 문화적 소양이 부족한 것으로 웃어넘길 수 있을 만하다. 그러나 그같은 극단적인 예를 제외하더라도 오해는 여전하다. 왜냐하면 일부 관객은 여전히 ‘누가 죽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 자체가 영화의 플롯 자체를 뒤집어엎을 만한 반전이 되지 않는 이상, 과연 그것을 스포일러로 묶어둘 수 있을까. 그런가 하면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고, 절름발이가 범인이라는 것은 여전히 스포일러”라는 ‘한번 스포일러는 영원한 스포일러’론도 있다. 이걸 조금만 오버하면 <스타워즈>의 “I’m Your Father”마저 스포일러로 간주하는 심각한 경우가 발생한다(실제로 이런 주장이 어느 인터넷 영화게시판에서 제기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문화적인 클리셰나 농담으로 변형되어 회자될 만큼 널리 알려진 반전마저 영원히 스포일러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둘 수 있을 것인가. 개봉 뒤에 게재되는 심층적인 리뷰에까지 스포일러 경고를 달라는 요구도 불합리하긴 마찬가지다. 국내 주요 일간지가 개봉주에 <올드보이>를 소개하며 “근친상간 다뤄…”라고 커다란 중제를 떡하니 실은 것과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리뷰 지면에다가 “Double incest”(이중 근친상간)라는 굵은 중제를 실은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아닌가. 글의 목적과 그것이 상정하는 독자층이 다를 때라면 스포일러에 대한 논의도 달라져야 함이 옳지 않을까.

사실 이같은 스포일러 민감증의 최대 수혜자는 홍보사들이다. 별달리 반전이라 할 것도 없는 등장인물의 죽음도 스포일러라 우기고, 알아도 별 상관없는 결말도 굳이 숨기려든다. 영리하지 못한 방법이지만 관객에게 잘 먹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이런 홍보 전략은 여름 한철 장사하는 휴양지 호객꾼에게나 어울리지 않나? 어쨌든 독자와 홍보사 사이에서 일종의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기자들은 가끔 곤혹스럽다. 특히나 도저히 스포일러가 될 수 없는 홍보용 ‘무뇌 스포일러’들은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나. 그럴 땐 그냥 속시원하게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쪽팔리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써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서야 앙코르와트의 돌벽에다 조용히 묻어둘 수밖에. 캄보디아행 비행기 값은 영화사에다 청구해버리고. 혹은 독자분들이 좀 내주시라.

김도훈 groove@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