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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라면 좋아할 영화네
2001-06-28

‘요란한 빈수레’ 자체인 <진주만>

● 현충일에 개봉하기엔 딱 그만인 블록버스터, 그러니까 마이클 베이가 1억4천만달러를 써가면서

만든 영화 <진주만>의 소재가 된 일본의 미국함대 기습공격은, 90분간에 걸쳐 전함 여덟척과 다른 선박 7척, 그리고 전투기 188대를

파괴했다. 약 2400명의 미국인이 사망했고, 거의 그 절반 정도가 부상을 당했다. 일본군은 고작해야 전투기 29대를 잃었고 100명도 안

되는 인명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이번에 개봉된 리메이크작과는 달리, 1941년 12월의 실제 진주만 공습은 언론의 블랙홀이었다. 이 엄청난 비극이 그나마 필름에 담길 수 있었던

것은, <트리폴리의 해변으로>라는 프로그램의 배경을 찍기 위해 내려온 폭스 무비톤의 촬영팀이 우연히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필름은 거의 11주 동안이나 압수당해 있었고, 해군당국의 정책에 따라 실제 전투장면을 거의 잘라내고 난 뒤에야 공개될 수 있었다. 공습으로부터

1년이 지난 뒤 원판 전체의 공개가 허용됐지만 이 사건이 완전한 형태로 스크린에 데뷔한 건 존 포드와 그렉 콜런드가 주로 재연장면으로 채우고

엄청나게 가위질한 ‘다큐멘터리’ 을 공개했을 때였다. 이제 사정이 달라지나?

<진주만>은 이 역사적 사건을 신화로 탈바꿈시켜 놓는다. 아버지의 농약살포용 경비행기를 타고 전쟁놀이를 하며 자란 시골소년 두명이

용감무쌍한 공군조종사(벤 애플렉, 조시 하트넷)로 자라나, 이미 유럽에서 전개되고 있는 전쟁에 미국이 합류할 날만 기다린다. 이때 십대 간호사들이

떼거지로 등장해서, 그 시대엔 어울리지도 않게 군인들의 궁둥이가 어쩌고저쩌고 수다를 떤다. 목석같은 벤 애플렉은 신체검사를 핑계로, 멋들어진

40년대 의상을 떨쳐입은 흑발미인 케이트 베킨세일에게 접근한다. 모두가 평화로운 진주만 기지로 떠날 날만 앞두고 있는데, 애플렉이 RAF(영국공군)을

돕겠다고 자원하고 나선다. 머지않아 그는 영국해협에서 공습작전에 참가하게 되고, 베킨세일은 다이어몬드 헤드 해변에서 오매불망 그를 그리워한다.

한편, 일본군은 쇠북소리에 맞춰, 로봇처럼 공습계획을 읊어댄다. 진주만에 대한 할리우드의 마지막 작품으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죽을 쑨 1970년작

서사극 <도라 도라 도라>는, 절반은 일본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2차대전이 무슨 국제적 공동생산의 결과물이라도 되는 양 다룬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경제압력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되,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행위에 대해서 짐짓 입다물는 건

여전하다. 돈밭이 될 일본시장에서 신용을 좀 얻어보려는 디즈니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다.

격렬한 로맨스와 시끌벅적한 수다로 무장한 영화 <진주만>은 <타이타닉>의 모델을 따라서, 전쟁영화라기보다는, 자 이제

소행성이 언제 지구랑 부딪친단 말인가, 하면서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되는 로맨틱한 재난영화에 가깝다. “군복 입은 사람들한테는 시간이 남아돈단

말이야.” 수줍음 잘타는 하트넷과 새로운 로맨스를 시작하려고 폼잡으면서 베킨세일이 투덜거린 말이다. 랜달 월레스가 쓴 시나리오는 믿기지 않는

몇몇 개인적 산전수전을 꾸며대는 한편으로, 언제나 불투명한 관료사회의 닭짓들을 그려젖힌다(‘고스트버스터’ 댄 애크로이드가 공습을 예측한 유일한

정보장교로 캐스팅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이 160분짜리 영화의 정확히 중간쯤을 지나고 나면, 드디어 전쟁장면이 나온다. 진주만의 상공은 저공비행하는 일본 전투기들로 새까맣게 뒤덮이고,

디지털 폭발음이 스크린을 흔든다. 배에 갇힌 사람들과 찌그러지는 금속물질들의 클로즈업장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너진 개미집 위에서 아우성치는

개미떼처럼 어딘지 인간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재난의 묘사는 설득력이 있지만, 스티븐 스틸버그보다는 덜 무자비한 마이클 베이는, 대혼란과

살상의 장면은 피한다. 30분쯤 계속되는 진주만장면은 애플렉과 하트넷이 전투기 이륙을 성공시키면서 약간의 복수전도 보여준다. 물 속에 떠 있던

병사들은 이 용감무쌍한 듀오를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이들이 올린 전과라고 해봐야, 불길 타오르고 시체 그득한 진주만이나, 숯검댕이가 되어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는 군인들의 참상에 비하면 쨉도 안 되는데 말이다. 월레스의 시나리오는 <도라 도라 도라>의 마지막 대사를 인용하고

있다. 야마모토 장군이 누가 봐도 확실한 한판승을 거두고 짐짓 하는 말.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결과만 된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리고는

루스벨트의 12월8일 의회연설을 길게 집어넣는다. 아닌 게 아니라 루스벨트(언뜻 알아보지 못할 모습의 존 보이트)는 영도력 있는 지도자로 친근스럽게

그려진다. 군지휘관들의 패배주의에 짜증이 난 그는 휠체어에서 힘겹게 일어나면서 “두번 다시 할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호령한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마침내는 지미 두리틀로 분한 알렉 볼드윈(브루스 윌리스 풍이다)을 추어올리며 도쿄공습 다큐멘터리의 축약판 같은 대목을 덧붙인다.

그리피스도 그렇고 올리버 스톤도 그렇고, 감독들은 역사와 드라마를 잘 섞을 줄 모른다. 미국이 유일하게 공습의 대상이 되었던 사건에 대한 이

새로운 해석은, 부시 정부가 추진중인 SDI 몽상을 음양으로 돕게 될 것인가?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조지 부시 대통령이 그렇게

열성적인 영화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요란한 빈수레 같은 이 영화에 대해 칭찬이 늘어지리라는 건, 굳이 점쟁이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2001.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