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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사물에 대한 예의

언젠가 주변의 한 친구가 연구실 홈페이지에 올렸던 이야기다. 그의 절친한 친구가 우산이 고장나서 함께 학교의 우산수리점에 갔다고 한다. “고치는 데 얼마나 들어요?” 고장이 좀 크게 났던지 3500원 든다고 했단다. “3500원? 약간만 더 보태면 새로 하나 사겠다. 그냥 가자.” 망설이다 나온 두 사람. 그러나 그의 친구는 다시 되돌아가서 3500원을 주고 기어이 우산을 고쳤다고 한다. “새로 사면 이 우산은 버려야 하잖아!”

버려진다는 것, 그것은 우산으로서는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것이다. 고치면 더 지속할 수 있는 생명이 우리의 약은 계산 속에서 쉽게 중단되고 버려지는 것이다. 만약 고장난 게 우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체였다면 어떨까? 심지어 엄청난 돈이 든다고 해도 고쳐서 “쓰려” 하지 않을까?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는 그토록 애지중지하건만, 그 신체가 남의 것이 되고, 더구나 다른 생물의 것이 되면 우리는 아주 쉽게 생각한다. 더구나 이처럼 그게 어떤 물건이나 ‘생명이 없는’ 사물이 되면, 고상한 윤리학자도 윤리학적으로 사고하길 멈춘다. 그건 윤리학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사물들은 쉽게 버려지고, 쉽게 삶을 마친다. 자신에게 허용된 것보다 훨씬 빨리. 지금처럼 물건이 흔해진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그 돈 들여 수리하느니 새로 산다는 식의 생각은 너무도 익숙한 태도 아닌가! 뿐만 아니라 멀쩡한 것이지만, 유행이 지났다거나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팔리고 버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리하여 옷은 2년을 채 가지 못해 옷장 속에 버려지고, 자동차도 3∼4년이면 버림받는다. 옷장을 열면 옷을 걸 틈도 없이 빼곡하건만, 어느새 “입을 옷이 없네”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물들과 결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 아니, 사물들은 우리 인간들과 아주 나쁜 관계를 맺고 있다. 목적에 맞추어 만들어지고, 비용에 비추어 버려지는 그런 존재, 그게 바로 사물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인간이나 생명체와 대비되는 ‘도구’라는 말로 그런 태도들을 정당화한다. 그들에게 사물이란 인간이나 생명의 소중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지워지고 스러져야 하는 ‘배경’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사물에 대한 거대한 저주다. 물론 그것은 흔히들 말하듯 “생산력을 해방하여 물자의 유례없는 풍부함을 산출한 시대”다. 그 거대한 ‘풍요’ 앞에 우리는 또 얼마나 쉽게 매혹되고 도취되는지! 그러나 그것은 사물들에 관한 한, 극단적인 속도로 사물들의 죽음을 촉진하고 가속화하는 시대임을 뜻한다. 사람들의 손에 있는 상품들을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이 새로 만든 상품으로 대체하는 것, 그것이 사물에 대한 자본의 원칙이다. 이를 위해 유행의 형태로든, 신제품의 형태로든, 혹은 기능을 통해서든 새로운 스타일을 통해서든 사람들의 손 안에 있는 것들을 급속하게 ‘낡은 것’, ‘구닥다리’로 만든다. 사물들은 자신의 생명이 채 다하기 훨씬 전에 버려지고 폐기된다. 사물에 관한 한, ‘자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죽음의 체제’요 ‘파괴의 체제’다.

‘철학’이나 ‘윤리학’이 사람들의 관계를 다루는 데서 멈춘다면, 그것은 너무도 안이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그 ‘관계’ 속에는 이미 수많은 사물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생산력이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투입량과 산출량의 비”로 정의되는 ‘생산성’과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마르크스의 그 개념은 자연에 대해, 사물에 대해 자신의 삶의 일부로 다루고 사유하라는 암묵적 권유처럼 읽힌다. 자연 내지 사물에 대해 자본주의가 생산하고 유포시킨 것과는 다른 관계를 구성하라는 강력한 권유처럼 들린다.

얼마 전에 몹시 가난한 한 친구가 나에게 난데없이 양말을 선물했다. 아무 말 하진 않았지만, 아마 내가 구멍이 난 양말을 그냥 신고 다니는 것을 본 모양이다. 그러나 구멍이 났다고 양말을 버릴 순 없는 일 아닌가! 청바지에는 일부러 구멍을 내기도 하잖아! 그러나 그게 시각적으로 불편한 사람들도 있는 듯해서, 구멍 난 양말을 모아, 잘할 줄도 모르는 바느질을 했다. 구멍을 메워 번듯하게 양말의 체면을 세워주는 게 나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의 ‘생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나는 그 양말들을 다시 꿰맬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