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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의 새로운 도전 [2] - 황진미가 본 <동상이몽>

섹슈얼리티에 관한 직소퍼즐

다양한 형식의 실험을 통해 ‘여성주의적 에로영화’에 대해 자문하다

<땀의 향기>

은 우선 영화 외적으로 흥미로운 영화이다. 첫째, 제작·배급 방식이 특이하다. (극장 개봉을 거치지 않고) TV유선채널에서의 개봉을 목표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제작비 15억원을 들여 HD카메라로 찍은 TV영화이다. 기존의 공중파에서 가끔씩 제작되던 TV영화와는 규모와 질감을 달리하는데, 이 영화의 방식이 고화질 디지털 시대를 맞아 새로운 영화의 제작 방식으로 자리매김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둘째, 감독의 행보이다. 에로비디오 감독으로 충무로에 입봉한 최초의 감독인 봉만대 감독의 극장 개봉작 이후 첫 작품인 이 영화가 감독의 변화된 행보를 보여주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행보가 특별히 흥미로운 이유는 그의 데뷔 사례가 도제 시스템 이후 아카데미나 해외유학 출신 감독이 주류를 이루는 ‘영화감독 되기’의 새로운 대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 외적 논의는 취재기자의 몫으로 남기고, 이 글에서는 영화 내적 관심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이 영화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대단히 신선하다. 첫째, ‘영화 만들기’에 관한 (메타)영화로, 이 형식은 영화가 주제로 삼는 여성적 섹슈얼리티 문제를 뚜렷이 하는 데 주효하게 작용한다. 둘째, 영화는 ‘여성주의적 에로영화’는 가능한가, 라는 화두를 좇는 극중감독과 청각에 이끌리는 음향기사를 통해 섹슈얼리티의 성차적 문제와 여성적 섹슈얼리티의 새로운 감수성을 환기시킨다. 셋째, 미학적 실험성이다. 시리즈를 관통하는 다각적인 관점의 이동(즉, 1편에서는 엑스트라로 보이던 인물이 2편에서는 주인공이 되는 식의)이나 각편에서 휘황하게 전시되는 역순편집이나 화면분할, 주관적 시점숏 등 세련된 기법이 눈에 띈다. 위의 특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 메타영화로서의 성차와 시점의 교차와 겹침

<깊은 그림>

이 영화는 ‘여성감독의 에로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이다. 일반적으로 ‘영화 만들기’에 관한 (메타)영화는 극중극을 통해 ‘자기반영’의 구조를 가지며, 시선은 ‘극중극의 인물->극중감독->실제감독’ 3중으로 중첩된다. 이 영화에서는 (하필이면) 극중극이 에로영화이고, 극중감독은 여성으로 실제 남성감독 사이에서 성차가 교차된다. 또한 (하필이면) 극중극이 ‘춘화를 그리는 화가’에 관한 영화여서, 시선의 겹침은 (3중이 아니라) 4중이 된다. 즉 ‘(여성)누드모델->(남성)화가->(여성)극중감독->(남성)실제감독’의 구조이며, 여기에서 시선의 중첩 속에 성차의 교차가 일어난다. 이 영화의 ‘자기반영성’과 ‘시선의 중첩’ 속에 성차가 어떻게 개입되는지 살펴보자.

자기반영성: 메타영화의 ‘자기반영성’은 양날의 칼이다. 마치 거울이 반성의 상징이자 허영의 상징이듯, 실제감독이 극중감독에 투영하는 자의식은 ‘자기반성’의 시선으로 수렴되기도 하지만, ‘자기변명’이나 ‘나르시시즘’으로 발산되기도 한다. 가령 시나리오 창작에 머리를 쥐어짜는 영화 은 창의성이 고갈된 작가의 ‘자기변명’의 예이며, 의 메이킹 필름격인 는 촬영현장의 신으로 군림하며 조감독과 남자배우를 쩔쩔매게 성희롱 =하는 감독의 ‘나르시시즘’의 일례이다. 의 자기반영성은 남성감독의 페르소나로 여성감독을 세움으로써 위의 함정을 피해간다. 뿐만 아니라 에로영화 만들기에서 성차의 문제로 논의를 확장시킨다. 더욱이 ‘먹물 신인’인 여성(극중)감독과 대립하는 베테랑 남성 촬영감독과 제작자의 입장은 실제감독이 자신의 확대된 자아를 분리해 대상화한 모습이다. 즉 남성관객의 성적 쾌락을 위해 여성의 몸을 대상화시킨다고 비판받는 ‘에로비디오 감독’ 출신 실제감독이 자신을 반대편에 놓고 대상화하는 동시에 남성적 에로영화를 찍으며 느껴왔던 자신의 오래된 고민들을 대상화해내고 있는 것이다.

시선의 중첩: 극중극에서 훔쳐보기 시선의 주체인 처녀 뱃사공 연실은 기생을 모델로 춘화를 그리는 은둔 화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가 화가를 비방하는 장사치를 죽인 뒤 둘은 함께 도망치는데, 그뒤 화가는 노를 젓고 연실은 신여성을 모델로 춘화를 그리게 된다. 이러한 줄거리는 ‘보는 남성 vs 보여지는 여성’의 도식을 깨고, 시선과 욕망과 성 역할의 전도(顚倒)를 보여준다. 또한 관계역전 이후 ‘춘화를 그리게 된 연실’의 바로 그 자리에 에로영화를 찍는 여성(극중)감독의 존재가 겹치게 된다. 그뿐 아니라 2편에서 줄곧 사용되는 주연배우 연실의 주관적 시점숏 역시 시선의 정치성을 드러낸다. 감독과 관객의 시선의 대상인 에로배우(그녀는 감독에게 “사람들의 눈이 가장 무섭다”고 말한다)가 시선의 주체가 되어 감독과 촬영감독이 성차적 입장 차이로 티격태격하는 현장을 굽어보며, 관객은 그녀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겹치고 자신의 분장되는 젖가슴과 껄떡대는 촬영부 스탭의 끈덕진 시선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2. 여성주의적 에로영화? 섹슈얼리티의 성차문제

<다음 여자>

<디렉터스 컷>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 나 감독은 여성주의적 에로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그녀는 ‘핑크색 유두’에 경악하며, “보여지는 영화가 아니라 말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를 수정하여 연실의 섹스장면을 그녀의 그리기 장면으로 대치한다. 그 과정에서 “오랜 컨벤션”으로 ‘주관객인 남성의 욕망에 충실한 영화’를 찍으려는 촬영감독과 사사건건 부딪친다. 영화는 나 감독 뜻대로 만들어졌지만, 제작자는 “뿅점이 없다”며 재촬영을 요구하고, 자기확신도 정치력도 없는 나 감독은 자신의 소신을 믿고 따랐던 연실에게 “흥행이 우선”이라며 다그치는 자기모순을 범한다. 또한 그녀의 작품은 (작품과 그녀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인) 원작자이자 친구로부터도 비판받는다. “어설픈 페미니스트 감독의 과욕이 부른 실패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는 에로티시즘의 여성주의적 재현을 고민하는 모든 작가들의 표상이자,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비판의식은 있으나 상황장악력이 없어 대안을 창출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대다수 여성(지식인)들의 서글픈 표상이다.

그 밖에도 이 영화는 영화 만들기 안팎에 포진한 ‘그녀들의 사랑’을 다루는데, 여기에도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색다른 견해가 숨어 있다. 1편에서는 ‘쿨한 척’하지만 냉담하고 이기적인 작가와 무명배우의 사랑이 나온다. 그는 그녀의 오디션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코알라 같고 소파 같은’, 나른하고 안락한 그녀와의 섹스만 탐할 뿐이다. 결국 그는 그녀를 ‘창 밖의 여자’로 만들고 그녀는 손목을 긋는데, 영화는 라디오 대사를 통해 일찌감치 ‘남자들의 사랑은 다분히 피상적’이라는 주제를 말하고 있었다. 3편에는 “귀로 섹스하는 여자”가 나온다. 음향기사인 그녀는 섹시한 남자에게선 “흥분시키는 소리”를 느끼고, 싫증이 난 남자에게선 쩝쩝거리는 소음을 느낀다. 휴대폰 속 남자의 목소리나 속삭임 심지어 “귀에 성병 걸릴 년”이라는 욕설에 오르가슴을 느끼는 그녀는 주로 시각적 자극에 흥분되는 남성들과는 달리 청각을 비롯한 오감이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는 여성들의 성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또 5편에서는 저돌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분장사의 처절한 눈물을 볼 수 있다. ‘비만인’인 그녀는 이성애의 주체로 제대로 재현된 적이 없는 일종의 ‘서벌턴’이다. 카메라는 그녀의 눈물을 정직하고 진지하게 잡으며, 그녀를 희화화하지 않는다. 또한 가장 대립각을 세웠던 촬영감독은 5편에서 나 감독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는데, 그의 마초적인 성향이 감정의 전달에 장애가 된 것이다(그래도 그를 사랑하는 분장사의 눈에는 “현장에서 티 많이 났다”며 알아차린다.)

3. 다양한 형식의 실험들이 갖는 의미

<밀착>

<벌거숭이>

이 시리즈는 전체 5편과 1편의 디렉터스 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편의 주연과 조연이 맞물리면서 자리바꿈이 일어난다. 나 같은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한 장소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인물들이 각자의 맥락과 관점에서 동일한 장면을 재구성한다. 1편의 주인공이 오디션을 보는 장면에 2편의 주인공인 나 감독이 슬쩍 나오고, 3편의 주인공 음향기사는 무심결에 1편의 주인공 곁을 지나치고 2편의 사건 때문에 촬영현장에 투입된 그녀는 주연 남자배우와 섹스한다. 4편은 극중극으로 앞서의 메이킹 장면들에 끼어들어 있던 장면들의 의미를 밝혀주고, 5편은 4편의 극중극이 제작자와 원작자에 의해 비판되며, 촬영감독을 둘러싼 분장사와 나 감독의 감정이 해명된다. 5편의 마지막 장면은 1편의 주인공 무명배우가 전체 영화의 주인공 나 감독과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 연실의 싸움에 뛰어들어가면서 완결된다. 영화는 매편의 마지막에 다음편을 예고하는 화면을 물려 끝내며 매편의 장면들의 빈틈은 다음편을 예비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독특한 방식을 취한 이유가 뭘까? 이런 방식은 한 가지 주제 아래 상호연관성이 없는 각편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다른 옴니버스영화들에 비해 (마치 ‘TV미니시리즈’를 보는 듯한) 긴장감과 연속성을 부여하며, 이는 매주 TV를 통해 상영된 이 영화의 배급·관람 방식에 잘 맞는다.

영화는 그외에도 1편에서의 역순편집이라든가, 다른 시간대의 사건이 한 공간에 겹치는 환상장면, 글자가 몸체를 따라 흐르는 장면, 2편에서의 절묘한 화면분할과 주관적 시점숏 등 무수히 많은 형식상의 실험이 나오는데, 이런 실험은 무의미한 실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목적을 지닌다. 가령 배우의 성기부위에 감독의 얼굴을 넣는 화면분할은 검열에 피하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 또한 종종 등장하는 극단적인 앵글은 좁은 TV화면을 덜 답답하게 보이도록 한다.

은 에로영화를 찍는 남성감독이 여성주의적 에로티시즘이란 어떤 것일까, 를 자문하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 (기특한!) 영화이다. 다양한 형식상의 기법은 위의 주제의식을 더욱 또렷이 부각시키며 처음 시도되는 제작·배급 방식에도 잘 맞는다. 결론적으로 은 일반 관객이나 특히 영화 관계자라면 한번쯤 볼 만한 영화이다. 다 볼 수 없다면 2편과 5편만이라도 꼭 보도록 권고한다. 여성주의적 에로티시즘에 대해 적어도 이 영화의 문제의식까지는 공유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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