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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애증과 복수의 드라마
2001-07-04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25 김수현(1942∼ )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여고생 나미는

어느날 교문 앞에서 인신매매를 당하여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창녀촌을 전전한다. 홍 여사는 필사적인 노력 끝에 딸을 되찾아 집으로 데려오지만

너무 늦었다. 나미는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홍 여사의 복수극뿐이다. 박철수의

<어미>는 당시 사회문제화되던 인신매매범들에 대한 일종의 예술적 단죄인데,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면서 나는 전율했다. 절제된 대사와

세련된 연출로 빚어낸 한 여자의 집요하고도 냉철한 복수극이 관객의 혼을 쑥 빼어놓았던 것이다. 특히 홍 여사 역을 맡은 윤여정이 마지막으로

인신매매단의 보스까지 살해한 다음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경찰이 들이닥치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한대 빼어무는 라스트신은 단연 압권이다. 과연 시체도

벌떡 일어나 앉게 한다는 김수현이로군! 나는 찬탄했다. 그리고 그의 다음 작품을 목놓아 기다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수현은 <어미>

이후로는 더이상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여고를 마친 김수현은 고려대 국문과를 마친 다음 1968년 MBC 개국 7주년 기념 라디오드라마극본 현상공모에 <저 눈밭에 사슴이>가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소설가인 유부남이 기생을 한 집에 들여와 살게 되면서 겪게 되는 여자들간의 갈등을 다룬 이 작품은 이듬해

본인의 각색을 거쳐 영화화됨으로써 시나리오 데뷔작으로도 기록되는데, 이때 맺어진 정소영 감독과의 인연은 이후 오래도록 지속된다. 김수현이 라디오드라마

작가로 데뷔하던 바로 그해에 <미워도 다시한번>으로 엄청난 눈물바람과 흥행돌풍을 일으키면서 충무로를 대표하는 멜로감독으로 등극한

정소영은 이후 20편 남짓되는 김수현 필모그래피의 절반 이상을 연출하며 탄탄한 파트너십을 지속하게 되는 것이다. 1970년과 1971년에 발표된

<미워도 다시한번 제3부>와 <미워도 다시한번 대완결편>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도 김수현이다.

김수현 시나리오의 플롯은

몇 가지의 유형으로 환원된다. 귀국하는 남편을 맞으러 공항에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청년에게 몸을 뺏기고 가족들의 곁을 떠나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 <잊혀진 여인>과 <나는 고백한다>이다. 남편이 죽은 줄 알고 그의 친구와 재혼했으나 뒤늦게 살아돌아온

남편과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 <아빠와 함께 춤을>과 <마지막 겨울>이라면, 두번이나 결혼했으나 남편이 모두 죽은 다음

탄광촌까지 흘러들어간 여인의 한 많은 삶을 다룬 작품이 <필녀>와 <욕망의 늪>이다. 이 모든 플롯들을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는 남편 혹은 아버지에 해당하는 ‘남성의 부재’다. 김수현의 주인공들은 대개 본의 아니게 남편 혹은 애인을 잃거나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다음 홀로 그의 아이를 키우며 모진 인생을 살아가는 여인들인 것이다. 김수현의 드라마가 전율적인 재미를 자아내는 것은 대개 ‘부재하는 남성’에

대한 애증이 복수의 플롯과 얽히면서 캐릭터들을 극단적으로 밀고나아갈 때이다. 본래 엄청난 시청률을 올렸던 연속극이었으며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리메이크되곤 했던 <청춘의 덫>은 김수현식 플롯과 캐릭터들의 정수가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다.

라디오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고 시나리오 작가로 명성을 떨쳤던 김수현이 자신의 재능을 백분 발휘한 장르가 TV드라마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안방극장 최고의 흥행작가는 단연 김수현이었다. 강렬한 애증과 복수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가운데

김수현 특유의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대사들이 자웅을 겨루면 누구라도 브라운관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심지어 김수현의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전국의 수돗물 소비량이 격감한다(주부들이 설거지를 하지 않기 때문에)는 통계까지 나와 있을 정도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답게 극본집과 장편소설

혹은 에세이집을 수십권 발표했으며, 특히 방송가에서는 작가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방송작가의 대모’로 추앙받고 있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9년 정소영의 <저 눈밭에 사슴이>

1969년 정소영의 <잊혀진 여인>

1970년 정소영의 <필녀>

1970년정소영의 <아빠와 함께 춤을>

1971년 이두용의 <죄 많은 여인>

1972년 정소영의 <이 밤이여 영원히>

1976년 변장호의 <보통여자> ★

1976년 정소영의 <나는 고백한다>

1978년 정소영의 <마지막 겨울>

1979년 김기의 <청춘의 덫> ★

1981년 정소영의 <겨울로 가는 마차> ⓥ

1982년 이두용의 <욕망의 늪>

1985년 박철수의 <어미> ⓥ ★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