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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웨이>와 알렉산더 페인 [1] - 알렉산더 페인의 작품들
박은영 2005-02-22

미국 인디영화의 이상향

<사이드웨이>의 알렉산더 페인, 그가 인디영화 감독으로 성공한 비결

2004년은 <사이드웨이>와 알렉산더 페인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난 10월 미국의 4개 극장에서 조용히 개봉한 <사이드웨이>는 상영관을 점차 늘려가는가 싶더니,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중년 남자들의 와인 여행을 다룬 이 영화에서 ‘최고’ 또는 ‘최악’으로 언급된 와인의 판매량이 영화의 파장을 따라 요동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평단의 반응은 ‘열광’ 그 자체였다. <필름 코멘트>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를 비롯한 각종 영화지가 <사이드웨이>를 ‘2004년 최고의 영화’로 꼽았고, 뉴욕과 LA, 샌프란시스코와 보스턴의 비평가들도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영화 속에서 최고의 와인으로 칭송하는 ‘피노 누아’처럼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세계가 깊고 풍부하게 무르익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피노 누아’가 좋은 환경에서 꾸준한 관심과 애정으로 재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의 명품이라니, 그 맛과 깊이를 닮았다는 영화 <사이드웨이>는 대체 어떤 재료를 어떤 공정으로 빚어낸 것인지 궁금해진다. 소문난 걸작 <사이드웨이>는 어떤 영화인지, 와인을 빚는 장인처럼 고집스런 행보를 보여온 알렉산더 페인은 어떤 감독인지를 소개하는 짧은 투어를 마련했다. 일명 ‘샛길 투어’다. 편집자주

<사이드웨이>의 촬영현장, 알렉산더 페인은 조바심이 나는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작가 지망생인 주인공 마일즈(폴 지아매티)가 출판사로부터 ‘삼진 아웃’을 당하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와인 시음장에서 행패를 부리는 장면,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던 마일즈가 처음으로 ‘폭발’하는 중요한 순간은 단번에 오케이가 나지 않았다. 와인 양동이를 얼굴에 들이붓기 때문에 주인공의 셔츠에 와인 얼룩이 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문제는 연결을 위해 준비한 셔츠가 몇벌 안 남았다는 데 있었다. 프로듀서인 마이클 런던은 테이크를 다시 갈 때마다 카운트다운을 해 보이면서, 현장에 있던 한 기자에게 애타는 속내를 드러냈다. “이건 우리 영화에서 대단히 큰 스턴트예요. 조엘 실버 영화에서 빌딩 하나를 날려버리는 것과 맞먹는 일이죠.”

여기서 잠깐, 엄살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아무리 저예산영화라지만, 셔츠 몇벌 갈아입는 걸 빌딩 폭파에 비유하다니. 게다가 알렉산더 페인이 누군가. 그는 UCLA 졸업 작품 시사 6주 만에 에이전트가 생겼고, 스튜디오와 작품 계약을 맺은 유망주였다. 당연히 장편 데뷔작 <시티즌 루스>로 주목받았고, 이어진 <일렉션>과 <어바웃 슈미트>로 온갖 영화상을 휩쓸면서 평단의 총애도 받았다. 칸 경쟁부문에서 상영돼 호평받았던 <어바웃 슈미트> 이후로 몸값 비싼 스타들이 러브콜을 보내오는 일도 허다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러셀 크로, 에드워드 노튼이 <사이드웨이>에 관심을 보였고, 알렉산더 페인은 그중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던 조지 클루니를 만나 설득했다고 한다. ‘출연해주세요’가 아니라 ‘포기해주세요’라고. 그는 인디 진영에서 스튜디오와 스타의 구애를 받는 드문 감독이다. 그런데 번번이 굴러들어온 복을 차고, 의상 한벌에 벌벌 떠는, 열악하다면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대체 무슨 고집일까. 메이저리그를 꿈꾸지 않는 마이너리그의 배짱은 낯설기만 하다.

결점투성이 루저의 삶에 끌리다

그 남자의 속사정을 헤아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알렉산더 페인이 영화로 만들고 싶어하는 소재는 ‘안 팔리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알렉산더가 내게 출연을 제안했을 때 농담하는 줄 알았다. 누가 그 영화에 돈을 대겠나 싶었다. 심지어 와인 영화라니.” <사이드웨이>의 주연배우 폴 지아매티의 증언이다. 알렉산더 페인은 한술 더 뜬다. “미출판 소설을 접할 기회가 많다. 출판되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뜻일 텐데, 내겐 그런 이야기들이 흥미롭다”면서 자신의 ‘마이너’ 취향을 과시한다.

작정하거나 의도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는 결점투성이 ‘루저’들의 삶에 홀린 듯이 이끌려왔다. 그의 분신들은 꿈이 없거나 좌절됐고, 사랑받거나 인정받지 못하며, 욕구 불만으로 쩔쩔맨다. <일렉션>의 주인공은 자타공인 모범 교사였지만, 야심만만한 여학생의 독주를 막아보려다가 결국 직장까지 잃는다. “저 아이의 야심에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따를까. 내가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지만, 그 자신도 선거 결과를 조작하고, 친구의 아내에게 욕망을 느끼는,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퇴직한 보험회사 중역 슈미트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어바웃 슈미트>). 하루아침에 직장과 아내를 잃은 노년의 슈미트는 남은 생의 유일한 희망인 딸이 잘못된 결혼을 하지 않도록 먼길을 달려가지만, 딸의 원망만 들을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알렉산더 페인이 “나의 첫 번째 러브스토리”라고 소개하는 <사이드웨이>의 주인공도 ‘세트’로 말썽이다. 일주일 뒤면 유부남이 되는 친구에게 총각파티 대신 제안한 와인 여행은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로 얼룩진다. 챈들러와 조이(<프렌즈>)의 늙고 속된 버전인 이들은 각자 와인과 섹스에 집착하면서, 그들의 우정과 선택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여행을 마친 그들은 더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명백한 ‘변화’를 암시한다는 의미에서, <사이드웨이>의 마일즈는 전작의 분신들과 작고도 큰 차이를 보인다. 영화 속 남자들과 비슷한 사십대 중반, 더이상 미래의 환상 뒤에 숨어 살 수 없는 나이가 된 알렉산더 페인은 <사이드웨이>를 “자전적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영화”라 부르며, 전보다 짙어진 온기와 통찰에 ‘이유가 있다’고 일러준다.

알렉산더 페인의 작품들

구제불능 루저들의 드라마틱한 인생

<시티즌 루스>(Citizen Ruth, 1996)

루스는 대책없는 여자다. 머물 곳이 없어서 낯선 남자와 섹스를 하고, 페인트 냄새를 맡고 환각 상태로 길에 널브러진다. 병원에선 그녀가 임신했다고 알린다. 환각제 상습 사용으로 경찰서에 끌려 오길 수 차례, 법정에선 “뱃속의 아기와 이 나라와 스스로에게 무책임한 죄로” 낙태를 강요한다. 어느 독지가의 집에 머물게 된 루스는, 낙태 반대 운동가인 그들의 의도가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선택의 자유를 지지하는 반대 진영에도 포섭되면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사회운동가들의 싸움에 이용당하던 루스는 “내겐 아무것도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의외의 반전을 시도한다. 페인의 영화 중 가장 신랄하고 어두운 사회풍자코미디. 일각에서는 감독의 ‘입장’이 없다고 비난했지만, 사회운동의 공허함과 위선을 지적한 것으로 충분했다.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인물에게 어느 순간 동조하고 지지하게 만드는 캐릭터 연출력은 이때부터 탁월했다.

<일렉션>(Election, 1999)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혁신적인 작품. 학생들의 신망을 받는 인기 교사인 주인공은 학생회장으로 단독 출마한 야심찬 여학생이 마뜩찮다. 동료 교사와 스캔들이 있었고, 결국 그를 매장시키고도, 자숙할 줄을 모르는 그 여학생을 좋게 봐줄 수가 없다. 정작 도덕과 윤리에 집착하는 그 자신은 친구의 아내를 욕망하고, 유혹에 흔들리고서도, 여학생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며 선거 결과를 조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다. 불륜과 선거 조작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의 인생은 내리막으로 치닫는다. 그 자체로 대단히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교사와 여학생, 라이벌 입후보자와 그 여동생의 네 가지 시점으로 펼쳐지는 등 정교한 짜임새와 재기발랄한 화법을 자랑한다. 어눌하고 선량한 이미지로 어필했던 매튜 브로데릭이 처량한 중년 남자의 면모를 새롭게 선보였고, 신인급이던 리즈 위더스푼은 이 영화로 <금발이 너무해>의 얄밉고도 귀여운 야심가 캐릭터를 따냈다.

<어바웃 슈미트>(About Schmidt, 2002)

잭 니콜슨의 열연이 돋보이는 황혼의 로드무비. 보험회사 중역으로 퇴직한 슈미트는 아내를 잃고 혼자 남는다. 보험 전문가로서 그는 홀아비인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9년 미만이라는 계산에 이르자,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조바심으로, 캠핑카를 타고 길을 떠난다. 하나뿐인 딸과는 소원해진 지 오래지만, 사윗감으로 소개한 딸의 남자가 맘에 안 들어서 결혼을 막아볼 생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그 무엇도 되돌리거나 바꾸지 못한다. 중요한 사람이 될 줄 알았지만 그렇지 못했고, 가족도 그에게 자부심이나 위안을 주지 못했다. 후원하는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쓰는 슈미트의 편지가 내레이션으로 흐르고, 현실과 따로 놀던 내레이션은 후반부로 갈수록 솔직해진다. “난 약해. 난 낙오자야”라고 고백한 슈미트는 소년의 답장에 왈칵 눈물을 쏟는다. 그건 소년과 슈미트가 손을 맞잡고 있는 그림 편지였다. 웃음을 주려는 의도로 만들었다지만, 슬프고 쓸쓸한 여운이 길게 남았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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