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오픈칼럼
[오픈칼럼] 독일에서 들려줘, 그때 그 함성
김수경 2005-02-25

축구를 보러 갔다. A매치는 월드컵 이후 처음이다. <씨네21>은 상암월드컵경기장과 10분 거리에 있다. 상암CGV에는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정작 서울FC의 경기를 봤던 건 지난 1년간 단 한번. 그럼에도 구정 당일에 급상경하여 축구장을 향한 것은 2002년 초여름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일본 드라마 <모토카레>의 엔딩에 남자주인공 도모토 쓰요시가 읊조리는 대사처럼. “사람에게는 누구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특히 그것이 여름이라면.”

그해 여름의 시작은 부산 폴란드전. 골문 반대편이라 순간 황선홍의 골이 안 들어간 줄 알았다. 사이드라인을 달리며 포효하는 그와 전광판을 확인한 뒤 아마 족히 5분은 울었다. 그는 나에게 각별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던 포항스틸러스 전용구장 가는 길, 동대문에서 쓸쓸히 목격한 프로축구사상 첫 8게임 연속 득점, 웹사이트 후추와의 “꼭 한국으로 돌아와서 은퇴하겠다”던 인터뷰, 툭하면 술자리의 안주가 되던 위대한 스트라이커가 넣은 그해 여름의 첫골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경기장. 축구선수였던 아홉살 터울 일본인 친구 노무라와 동석한 좌석은 C구역 9열 27번. 반대편에 열정의 N구역이 보인다. 그해 여름에는 나도 여자친구와 N구역에 있었다. 일명 붉은 악마 존, 현재의 N구역은 M, O, P구역을 모두 흡수해 도도한 붉은 물결을 이룬다. 동행인과 자리는 변했지만 풍경은 낯설지 않다. “피파 랭킹 1위하는 그날까지”, “나 죽거든 축구장에 묻어다오”, 카드섹션은 ‘대한*민국’, 날아드는 휴지폭탄과 꽃가루, 그리고 킥오프.

후배 차 위에 올라 카퍼레이드를 벌이다가 상판을 내려앉힌 미국전, 골키퍼 유니폼을 입은 친구가 술집 문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포르투갈전, 기적의 이탈리아전과 투혼의 스페인전까지 학업과 아르바이트는 모두 작파한 지 오래였다. 선배들도 쩔쩔매던 발터 벤야민을 전공한 선생(내가 매우 좋아하던)께서는 수업에 모두 빠진 제자에게 마지막 술자리에서 애절한 눈빛으로 한마디 하셨다. “축구가 그렇게 좋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레알 마드리드를 준다 해도 우리팀과 바꾸지 않겠노라고.

다시 경기장. 엄격한 히딩크의 통과의례를 견디지 못해 그해 여름에 고배를 마셨던 이동국. 황선홍의 애제자였던 그가 수비수 머리를 지나친 공을 절묘한 바디밸런스로 몸을 누이며 하프발리킥을 때린다. 벼락같은 선제골. 본프레레의 황태자가 문전을 유린하자, 쿠웨이트의 미드필드도 같이 무너져간다.

독일전을 봤던 곳은 신촌. 양볼에 새긴 “요코하마로 가자”라는 염원에도 불구하고 발락의 문전쇄도 한번에 우리의 그해 여름은 막을 내린다. 30분 만에 신촌로터리를 메웠던 인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쉬움에 발길을 돌렸던 홍익대. 사람들이 삼거리 차도를 막고 파티 중. 편의점에서 공수된 맥주는 반은 먹고 반은 서로에게 뿌려댔다. 지프 위에서 그날의 난장 혹은 파티를 주도하던 크라잉 넛. 얼마 전 군복무를 마치고 귀환공연을 했다. 다시 후반전의 경기장. 히딩크의 아이들, 아인트호벤 듀오가 경기의 마침표를 찍는다. 90분간 경기를 지배한 박지성의 스루패스, 처음 맡은 오른쪽에서 질풍처럼 나타난 이영표의 아웃프런트 킥이 골망을 가른다. 2006년 독일을 향한 첫 발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여름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