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 온 <아버지와 딸>(마이클 두독 드 비트)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심금을 울릴 만한 빼어난 애니메이션. 어느날 아버지는 딸에게 뜨거운 포옹을 남긴 채 배를 타고 떠난다. 딸은 반복해서 아버지를 맞으러 강가에 오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딸은 그렇게 늙어간다. 단순한 구성에다 색과 선이 자제된 극히 간소한 표현이지만 어떤 장편 못지않은 묵직한 비애감을 감염시키는 마술적인 작품. 동양의 산수를 연상케 하는 묵화적 풍경에 펜화적 섬세함을 조화시킨 표현기법도 탁월하다.

<낙하>(체코, 아우렐 클림트)는 경쾌하고 신랄한 해학과 모델애니메이션기법 양면에서 눈에 띄는 단편. 처마 끝에 노인이 매달린다. 노인이 언제 떨어질지가 갑자기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된다. 그러나 노인에 대한 관심은 그의 생명에 대한 걱정과 관계없는, 무료한 삶 가운데 돌출한 하나의 스펙터클일 뿐이다. 구경거리를 기다리다 사람들이 모두 지쳐 떠나버린 빈 거리 위에 마침내 노인이 떨어진다. 감독은 전 과정을 우스꽝스런 소동극으로 그리면서도, 획일화와 무관심에는 날카로운 풍자의 칼을 들이댄다. 기괴한 세트도 볼 만하다.

다소 중후한 앞의 두 작품과 달리, <퇴짜>(미국, 돈 헤르츠펠트)와 <폴링>(한국, 전영찬)은 90년대 세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무기로 내세운 기발한 애니메이션. <퇴짜>는 각각의 에피소드 앞에 ‘가족 교육용’이란 타이틀이 뜨지만 내용은 엽기다. 과장되고 뒤틀린 캐릭터들이 잔혹성과 피가 난무하는 생존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이런 유희적 엽기에 신물이 난 관객이라도 마지막 에피소드의 재기에는 무릎을 치게 된다. <폴링>은 단 하나의 아이디어만으로도 어엿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살하는 사람과 그를 구경하는 사람의 관계가 역전되는 마지막 반전은 전복적 감수성이 구성의 묘와 만날 때의 짜릿한 쾌감을 전해준다.

실사영화 중에선 판타지적 상상력을 앞세운 <복사가게>(오스트리아, 피르길 비트리히)와 <쇼핑카트 무도회>(독일, 하리 플뢰터, 요르크 지프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복사가게>는 복사가게에서 일하는 사내가 어느날 자신의 생활이 복사되고 마침내 복사된 수많은 자기 속에 둘러싸인다는 줄거리. 주제의식이야 새로울 게 없지만, 무성영화적 동작과 종이의 질감을 이용한 표현기법과 기발한 편집솜씨가 반짝인다. <쇼핑카트 무도회>는 백화점에서 실직한 쇼핑카트 관리자가 쇼핑카트를 오케스트라처럼 지휘하며 바다로 데려간다는 이야기. 쇼핑카트가 발레리나처럼 춤추는 모습을 갖가지 앵글에서 잡은 실험적 장면들이 매력적이다.

재미로 치면 <이지 머니>(프랑스, 필립 뒤솔)를 빼놓을 수 없다.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은행을 터는 나쁜 젊은이들을 마치 롤러 스케이트로 뒤쫓으며 찍은 듯한 초고속의 화면이 보는 사람의 얼을 빼놓는다. 이 밖에 인간에게 학대받고 혹사당하던 쥐가 혁명을 일으키는 <쥐, 글을 쓰다>(영국 아일랜드, 빌리 오브라이언), 가상 현실에 탐닉해 어두운 현실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미래의 가련한 인간을 그린 <가상탈출>(뉴질랜드, 피터 살몬)은 묵직한 주제의식이 앞세운 출품작들.

허문영 기자 moon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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