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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비더버그 감독의 <엘비라 마디간>
2001-07-05

운명의 우아한 줄타기

Elvira Madigan 1967년, 감독 보 비더버그 출연 피아 데게르마르크 7월7일(토) 밤 10시10분

<엘비라 마디간>에 대해 뭔가 새롭게 이야기할 만한 것이 있을까?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곡예사와 탈영병의 사랑이야기. 이것만으로 영화에 관한 설명으로는 흡족할 것 같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엘비라 마디간>은 다른 신파극이 그렇듯 여성 캐릭터에 무게중심이 쏠려 있다. 한 남자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 그녀는 금발머리를 찰랑거리며 풀밭에서 깡충깡충 뛰논다. 얼핏 보기에 별다른 개성이라곤 없는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차츰 상황이 확연해진다. 영화 속 엘비라는 운명에 대해 남성보다 민감하고, 결단력도 빠르다. 동반자살을 제안하는 것도 그녀다. 심지어 엘비라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권총 방아쇠조차 당기지 못하는 남성을 재촉한다. “우리에겐 이 방법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이런 시각으로 <엘비라 마디간>을 보면 이 영화는 아시아권영화, 특히 자신의 운명을 거침없이 수용하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곤 했던 1950년대 일본 멜로영화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처음부터 두 연인 앞엔 행복한 결말이 보이질 않는다. 서커스단에서 줄타는 곡예를 하는 엘비라는 우연히 장교 식스틴을 만나 사랑을 느낀다. 식스틴은 부인이 있는 처지지만 엘비라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식스틴은 군대에서 탈영한 뒤 엘비라와 함께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도주한다. 군대라는 조직과 가족의 틀로부터 도망하는 두 사람은 잠시 행복을 맛보지만 그 기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행복은 잠깐일 뿐이며 길고 잔인한 슬픔이 어느새 시작되는 것. 두말할 나위 없이, <엘비라 마디간>은 화면이 예쁜 영화다. 보 비더버그 감독은 영화 내내 아름다운 두 연인과 북유럽 풍경을 전경화하고 있다. 엘비라와 식스틴은 풀밭에서 어린아이마냥 뛰어놀고, 자연과 하나가 된 채 시간을 보낸다. 몽롱하기 그지없는 연애감정을 화면에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감독이 ‘예쁜’ 그림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란 힘들다. 산과 들로 정처없이 떠돌면서 생활하게 된 엘비라는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늘 깔끔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지나치게 이미지가 조작되었다는 느낌을 남기는 거다. 스웨덴 출신의 보 비더버그 감독은 <엘비라 마디간> 이전까지 사회적 메시지를 간직하는 리얼리즘계열 영화를 주로 만든 편이다. 영화가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뒤 보 비더버그 감독은 작품 수준이 하향세를 그리며 뚝 떨어진 편인데 이후 이렇다 할 수작을 만들지 못한 채 연출생활을 마감하고 말았다. 국내에서 개봉했던 <아름다운 청춘>(1995) 역시 <엘비라 마디간>의 흔적, 다시 말해서 사랑에 관한 낭만주의와 모호한 분위기를 다시금 강조하는 범작에 그쳤다.

어쩌면 <엘비라 마디간>은 국내에서 유럽영화를 평가하는 ‘그릇된’ 기준이 된 작품인지도 모른다. 클래식음악이 흐르고, 약간의 지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교양영화를 곧 유럽영화와 등치하게 된 기준 말이다. 이 밖에 여러 가지 사소한 트집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영화에서 엘비라 역의 피아 데게르마르크는 남성이면 한번쯤 꿈꿔봤을 법한 여성의 판타지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무한히 희생적이면서 운명이라는 줄 위에서 극히 불안정하게 곡예하는 여성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그녀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