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Enjoy TV > 드라마 칼럼
[드라마 칼럼] 바닥 드러낸 사랑의 흥미진진함, <사랑과 전쟁>

'저 사람하고는 못 살겠다'는 부부들의 이야기

‘콩깍지’가 다 벗겨진 후의 사랑을 그리는 드라마 <사랑과 전쟁>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저 사람 없이는 못살겠다’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다 지나고 나면 금요일 늦은 밤에는 ‘저 사람하고는 못살겠다’는 부부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KBS TV의 장수 프로그램, <사랑과 전쟁>이 그것이다.

이 드라마는 여타의 작품들과는 달리 ‘콩깍지’가 다 벗겨진 후의 사랑을 그린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야말로 ‘바닥을 드러낸 사랑’을 보여주는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 적나라함만으로도 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어떤 드라마에서보다 더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역시 그러하다. ‘폐인’이라고 지칭할만한 팬 층은 없지만 종영한다는 소식이라도 알려지면 여기저기서 반대 의견이 올라올 것 같은, 이 드라마의 무시 못할 인기를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사랑도, 으리으리한 배경도, 예쁘고 잘생긴 유명 탤런트도 한 명 없는 아주 평범한 드라마인데 말이다.

처음에는 ‘실화’라는 설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고 훨씬 더 많은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하는 ‘실화’라는 설정. <사랑과 전쟁>은 여기에 ‘싸움구경’의 재미까지 덧붙여진 경우인데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는 말도 있듯, 남의 집 부부싸움을 소재로 한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다.

사랑했던 사람을 원수로 여기게 되는 과정?

그러나 비단 남의 집 부부싸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만 보니 이 드라마는 사랑했던 사람을 원수로 여기게 되는 과정을 꽤 흥미롭게 그리고 있었다. 미혼 여성들의 관심사가 ‘사랑을 이루는 과정’에 있다면, 그 사랑을 다 이룬(?) 기혼 여성들의 관심사는 ‘사랑이 식는 과정’에 있지 않을까.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 혹은 공감 차원에서 <사랑과 전쟁>은 기혼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인기 비결을 자극적인 내용으로 보는 시선이 많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게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고부갈등, 남편의 외도, 폭력, 아내의 허영 등 자극적인 소재가 주를 이루고는 있지만, 실제로 많은 부부들이 고민하는 문제이기에 단순히 보아 넘기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흔해빠진 이야기 속에 의외의 통찰력이 녹아있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진짜 매력이 아닐까? 콩깍지가 벗겨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그 못난 사람을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고, 사랑이 식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다는 암시를 주는 드라마가 흔치는 않은 것이다. 그 남자의 돈이 좋아 결혼했지만 결국 돈밖에 모르는 그가 싫어졌다거나, 화려한 외모에 반했지만 결국 그녀의 허영심에 질렸다거나. 사랑을 시작하는 계기와 끝내는 계기가 실상 같다는 암시처럼 다른 드라마에서는 만나기 힘든 현실성이 많은 기혼자들의 공감대를 끌어내는 이유일 것이다.

계속되는 부부싸움에 때로는 짜증도 나지만 이 드라마를 볼 때면 ‘결혼’이 유별나게 잘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듯 이혼 역시 못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남의 집 부부싸움에 그토록 열띤 관심을 기울이고 ‘이혼찬성, 이혼반대’ 투표에 그토록 열심인 시청자들의 존재를 생각하면 묘한 기분도 든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남의 불행에서 기운을 얻는 인간의 심리와도 무관하지는 않을 게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남의 불행에서라도 기운을 얻어야 할 만큼 현실 속의 결혼생활이 고되다는 뜻이다. 수많은 기혼자가 ‘이혼’에 가지는 지대한 관심, 수많은 미혼자가 결혼도 하기 전에 갖는 ‘이혼’에 대한 공포. 유명 탤런트 한 명 없이 오래도록 방영될 수 있었던 <사랑과 전쟁>의 인기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