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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영화주간지 기자의 직업병
김혜리 2005-03-11

김혜리

“언젠가는 영화를 만들려는 생각이 있죠?” “영화공부를 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질문들을 받을 때마다 우물거린다. 나는 영화도 좋았지만 잡지도 영화 못지않게 좋았다. 한 영화에 관해 또 하나의 스토리를 지어내고 그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영화 이미지를 고르고 거기에 리듬을 넣어 지면을 구획하는 일이 즐거웠다. 예전에는 외화 수입사들이 파일이 아니라 슬라이드로 신작의 사진을 제공했는데, 날 잡아 영화사들을 돌며 새 영화 슬라이드를 한 보따리 챙겨와 하나하나 불빛에 비춰볼 때면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아무튼 잡지에는 일간지가 결코 누릴 수 없는 넓은 공간이 있고 연구서가 도저히 허락 못할 허술함- 유희의 여지- 이 있다. 유례없는 영화주간지를 창간하고 처음 2년 동안은 “이러다가 끝내 못 가지” 노래를 불렀지만 끝내는 일주일에 한번씩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일의 즉각적 결과를 손에 쥐는 생활주기에 신진대사 리듬이 맞춰졌다. 게다가 한주 동안 집중적으로 읽힌 다음 버려진다는 사실도 어딘가 운치가 있다(얘기가 이쯤되면 대부분 동정의 눈길을 보낸다).

이렇듯 영화주간지라는 직장에 기꺼이 길들어 장시간 생활하다보니 당연히 직업적 습관들이 생겼다. 일단 일상생활의 시간관념이 철저히 ‘7진법’에 지배된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는 알아도 며칠인지는 절대 모른다. 그나마 날짜를 기억하는 금요일(극장개봉일)을 기준으로 며칠이 흘렀나 헤아리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다. 마감 중에는 계속 기사를 고쳐 쓰는 실험영화 같은 꿈을 꾼다. 반면 마감 뒤의 꿈은 하이브리드 장르의 모험물이기 일쑤다. 제법 흥행 강박이 있는지 캐스팅도 스펙터클도 화려하다. 자면서도 더욱 독창적이고 충격적인 클라이맥스를 찾아 고심하는 나의 무의식이 안쓰럽다. 때로는 꿈 도입부에 이십세기 폭스의 팡파르가 울리고 미라맥스의 맨해튼 스카이라인이 깜박거리고 꿈이 지루하다 싶으면 리모컨을 찾다 깰 때도 있다. 기자마다 다르겠지만 기억력 부실한 내 경우에는 펜과 종이 없이 영화 보기가 불안하다. 그래서 명절에 뒹굴뒹굴 TV영화를 볼 때도 “나중에 기사 때문에 다시 보려면 시간 걸리는데 지금 메모를 해야 하나?” 보는 내내 갈등한다. 같은 이유로 다 쓴 수첩도 못 버린다. 실제로는 한 글자도 당최 알아볼 수가 없으니 무용지물인데도. 더 치명적인 장애도 있다. 어떤 세계가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증세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이따금 촬영현장을 방문해도 자꾸 모니터 뒤를 맴돈다. 프레임이 없는 현실에서는 뭔가 찬찬히 관찰하고 판단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생긴 직업병은 좀더 심각하다. 병명은 무력증, 영화잡지 만드는 재미의 한 부분이 사라져간다는 기분이다. 물론 원흉은 개인적 피로다. 그러나 이 증세에는 영화산업이 커지고 상품으로서 영화의 가치를 계산하는 셈본이 체계화되면서, 영화와 기자가 만나는 방식이 점점 제도화되는 현실도 작용한 듯하다. 요즘 한 영화의 촬영현장 기사는 일제히 나온다. 수많은 매체가 초대되어 북적이는 현장에서 영화를 좋아하는 이라면 당연히 느낄 흥분이나 은밀한 관찰의 순간은 드물다. 출연작 개봉이 임박하지 않은 배우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힘들다. 서로 다른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을 초대해 제3의 스토리로 사진을 찍으면 얼마나 멋질까. 영화에 관련된 모든 정보의 노출 시기가 엄격히 관리되면서 급기야 보도 자료가 곧 기사가 되는 등식까지 성립해 “이번주에 ‘기사’ 보내겠습니다”라는 당혹스런 어법을 접하기도 한다. 때로는 맛도 못 보고 음식물을 통과시키는 목구멍이 된 듯하다.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내가 알고 싶은 이야기를 캐묻는 잡지를 그려본다. 그 책에는 더 많은 우연과 침투와 돌발사고가 있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