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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혜> 3인3색 감상 [1] - 전경린
2005-03-15

전경린·신경숙·심영섭의 <여자, 정혜> 감상문

<여자, 정혜>가 남자 감독의 손에서 나왔다는 점은 아무래도 특별하다. 정혜의 아주 조그만 몸짓 하나, 눈빛 하나, 표정 하나가 쌓이고 쌓여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그의 삶이 놀라운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숨결은 아프고, 슬프며, 저리다. 우리는 정혜의 처연한 보호본능이 실제로 어떤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정혜라는 캐릭터가 남다르지 않을 듯 보이는 소설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경린, 신경숙 두 작가가 흔쾌히 글을 보내주었고, 임상심리를 겸하는 영화평론가 심영섭이 영화 밖의 ‘전공’을 살려 정혜를 바라봐주었다.

“우리의 일상이란, 꼭 다문 조개 같은 것”

전경린/ 소설가·<황진이>

영화를 보는 내내 바람에 먼 곳의 문이 흔들리는 듯 희미한 경첩 소리가 들려왔다. 삐걱삐걱…. 이 세상 어디선가 오래 닫혀 있던 문 하나가 열리려고 저리 앓는 것일까…. <여자, 정혜>는 특별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한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 속에 몸을 웅크리고 스며들어 특별함을 지워가는 이야기이다.

어느 거리에서 내쪽으로 다가온다 해도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은 정혜가 범상치 않은 것은 자기 상처를 너무나 잘 돌본다는 데 있다. 자기 부정도 없거니와 섣부른 극복의 강박도 없고 불행의 표징도 없다. 무표정과 무감각과 무기력과 방심조차 상처에 대한 가장 부드러운 방식의 보살핌 같다. 묵묵히 단정하게, 거의 결벽증을 가지고 질서정연하게 직장에 출퇴근을 반복하고 장 보고 먹고 청소하고 몸을 씻고 잠을 잔다. 그리고 이 기본적 살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종교나 남자, 술과 담배, 친구나 친척, 심지어 쇼핑이나 탐식,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어떤 욕망도 없으며 아프지도 않고 좋고 싫음도 분명히 표시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서둘러 고도의 우울증이라고 진단할 테지만, 이런 삶의 모습이 단자화된 도시의 현대인에게 더이상 새롭지만도 않다. 삶이 힘겨울 때, 동작을 최소한으로 줄이거나 욕망을 버리는 방법은 삶과 싸워 이기는 것 못지않게 훌륭한 극복법이다. 생의 중심에 깊숙한 상처를 안은 채 최소한의 살기에 집중해 있는 정혜의 의식적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수도자의 생활같이 금욕적이고 단단하게 보인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습관의 정적 속으로 흘러가는 저마다의 회색빛 일상의 의미를 반추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의 일상은 실은, 핵과 같은 상처를 감싸고 입을 꼭 다문 조개 같은 것이 아닐까?

정혜가 우리 속에 잊혀지지 않는 표정으로 남는 이유는 상처 입은 자라는 하나의 은유로서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는 우리 모두와 교감하기 때문이다. 원죄라는 단어, 카르마라는 종교적 단어가 예시하듯 우리는 자기 고통의 근원적 원인자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상처를 정확히 모르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완성할 수밖에 없는 치유의 삶을 살아간다. 사실 보이는 상처, 지금 당장 마주하고 있는 사적 고통이란, 우리가 그 근원을 모르는 고통과 상처를 통과하는 개인화 의식이며 카르마를 해체하는 의례이고 세계의 곪은 환부 한 군데를 치유하는 헌신일 수도 있다.

정혜가 아파트 화단에서 새끼 고양이를 제 집으로 데려가 풀어놓을 때, 울분 때문에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는 술집에서 만난 청년을 여관까지 따라가 마치 성녀 같은 포즈로 안아줄 때, 주뼛주뼛 관심을 보이는 내성적인 우체국 방문자를 용감하게 집으로 초대하고 과하게 음식을 준비할 때에 솔직히 나는 불안했고 짜증스러웠고 불편했다. 그리고 가슴이 저리도록 공감했다. 그것은 살아가는 생명체 모두가 간직한 은밀하고 서툰 꿈틀거림이며 삶이란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무엇을 한사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혜는 주워온 새끼 고양이를 내버리고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남자를 찾아갔다. 그러나 결심한 바를 행하지 못하고 격렬하게 운다. 나는 정혜가 그를 응징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자신의 불가능한 연약성 때문이 아니기를 바란다. 오히려 상처에 새 살이 덮여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기에, 상처 입은 그대로 자기 자신인 것을 깨달은 자의 울음이기를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고양이를 안아올렸던 같은 자리에서 한 남자를 재회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덕분에 이 영화의 원작인 우애령씨의 단편소설들을 더 재미있게 읽었다. 내용도 스타일도 주제의식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디테일간의 결합력과 은유적 기법으로 의미를 연결하고 확장시키는 방법이나 인물의 정서에 밀착해 큰 사건 없이도 집중력 있게 끌고나가는 힘은 감독의 역량과 함께 문자 원작을 가진 영화의 탄탄한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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