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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혜> 3인3색 감상 [2] - 신경숙
2005-03-15

정혜는 비밀을 지닌 여자들의 집합체

신경숙/ 소설가·<J이야기> <바이올렛>

무슨 맥락에서였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느낀 첫 소감은 내 소설 <바이올렛>을 읽어준 독자들이 참 힘들었겠구나, 고맙구나, 뒤늦은 감사였다. 감독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우체국 여자 정혜 위에 나는 내 소설 <바이올렛>의 꽃집 여자 오산이를 떠올렸다. 정혜는 스물아홉 산이는 스물 셋이었으니 정혜가 언니일까? 아니 <바이올렛>이 쓰여진 때가 4년 전이니 산이도 이제 스물일곱이거나 여덟이 되었겠다. <바이올렛>을 쓸 때 내 마음과 견주어 짐작해본건대 <여자, 정혜>를 만드는 동안 감독은 아마 모든 여자들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앉아 있는 여자, 졸고 있는 여자, 거울을 보는 여자, 눈썹을 떼어내는 여자, 서 있는 여자, 음식을 먹는 여자, 응시하는 여자, 뒤돌아보는 여자, 귀기울이는 여자들. 그녀들의 손짓, 어깨의 흔들림, 종아리의 움직임, 귀를 만지거나 얼굴을 쓰다듬거나 손깍지를 낄 때의 미세한 변화들과 무엇보다도 수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으나 혼자 걷는 듯 거리를 타박타박 걷고 있는 여자들에게서 한시도 눈길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나 사실은 저 깊숙이 아직 누구에게도 발설해보지 못한 말을 숨기고 있는 익명의 여자들의 집합체가 여자, 정혜이다. 카메라는 스쳐 지나가면 곧 잊혀지고 말 존재인 정혜를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처음엔 담담히 함께 따라가던 관객은 어디쯤에서 저 무표정한 여자에게서 무얼 발견해내겠다는 것이지? 의문을 품고 더욱 진지하게 그 여자를 응시하는 패와 그만 그 여자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를 포기해버리는 패가 갈린다. 그 만큼 여자, 정혜는 무엇무엇이라고 딱히 지시할 수 없는 침묵을 내포하고 있다. 가끔 그녀가 침묵을 깨고 내뱉는 말들은 현실과 부합되지 못하고 황당하게 겉돌아 픽 웃게 만들지만 다시 한번 생각하면 그게 그녀의 말이다. 그녀만의 말이다. 겉으로 보기엔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이 책장처럼 한장한장 펼쳐진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응시하면 정혜가 살아내고 있는 그게 그것인 것 같은 일상은 끔찍한 소통부재와 고독으로 얼룩져 있다. 이미 잠이 깨었는데도 시계를 들여다보며 알람소리를 기다리는 그 여자의 눈, 처음 만난 술 취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는 그 남자를 껴안아주는 그 여자의 어깨, 소파에 늘어져 있는 그 여자의 팔, 설거지를 하다가 그 여자가 흘깃 뒤돌아볼 때나, 그 여자가 주문 배달된 김치를 우적우적 씹어먹는 걸 보다가 어느 순간 침묵에 휩싸여 있는 것 같던 그 여자가 갑자기 쫓아가듯 그 남자에게 뛰어가더니 고양이를 보여주겠노라고 저녁에 집에 오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 때 관객은 그만 어… 하며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저 보고 있거나 웃다가 그 여자의 팔이 나의 팔이고 그 여자의 눈동자가 나의 눈동자이고 그 여자의 말이 내가 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감지하기에.

그 여자의 고독이 화면을 넘어 전이되는 그 순간에 배우 김지수가 놓여 있다. 전혀 연기하는 것 같지 않게 김지수는 정혜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살아낸다. 조금만 오버하거나 조금만 위축되었어도 그대로 균형이 깨져 설득력이 없었을 익명의 여자 정혜를 김지수는 그야말로 조심스럽게 살아낸다. 김지수가 정혜의 침묵과 그에 맞서는 돌발 행동과 발설해보지 못한 깊은 상처를 섬세한 움직임으로 포착해내기 때문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설명되지 않는 정혜의 내면을 이해하게 된다. 왜 그녀가 결혼 첫날 혼자서 집으로 돌아와버렸는지, 왜 그녀가 어두운 숲에서 새끼 고양이를 데려다 기르는지. 왜 그녀가 구두를 파는 상점에서 안절부절하면서도 끝끝내 한마디를 하고 나오는지. 김지수로 하여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것 같던 정혜의 내면은 낱낱이 헤쳐지고 스쳐 지나가면 그만일 것 같은 그 여자가 사실은 자기만의 말과 행동방식을 가진 독특한 존재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여자, 정혜가 평범한 것 같은데도 낯선 바람 같은 영화로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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