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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남자, 이카로스가 되다,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

<달콤한 인생>이란 지독히 반어적인, 그리하여 상투적이기까지 제목. 인생이란 실은 달콤하지 않을뿐더러 달콤하더라도 그 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릴 것이란 암시가 아닌가.

앞날은 온통 장밋빛일 듯한 잘빠진 사내의 추락담인 김지운의 누아르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이 이병헌이라는 건 의외로 신선하지 않다. 이병헌 말고 누가 이보다 더 근사하고 절망적인 추락을 보여줄 수 있을까. 보스인 강 사장(김영철)이 절대 신뢰할 정도로 성실하며, 그 지위가 강 사장 바로 아래일 만큼 연륜도 있어야 하되, 강 사장의 숨겨둔 정부를 보자마자 설렐 정도로 소년 같은 데가 있어야 하며, 까닭없이 강 사장의 뜻을 거스를 만큼 반항아 기질도 있어야 한다. 복수의 순간조차도, <킬 빌>의 경구처럼 차가운 음식 먹듯이 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 와락 눈물이 가득 고이는 커다란 눈이 있으면 더 좋다. 이쯤 되면 이병헌 말고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겨드랑이에 돋은 날개를 펄럭이며 한껏 솟아오르다가 날개에 붙은 밀랍이 태양열에 녹아 떨어져 죽은 이카로스를 떠올렸다. 이카로스가 하늘 높이 올라가지 말라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경고를 잊은 것처럼 김선우(이병헌)도 강 사장이 사흘간 정부 희수(신민아)를 지켜봐달라는 부탁을 잊는다. 그리고 이카로스처럼 추락한다.

김지운 감독이 시나리오도 없이 대뜸 만나자고 한 뒤 이병헌을 단번에 설득시켰다는, 그 청담동 카페다. 계단에서 사진을 찍는 이병헌의 입가엔 으레 봐왔던 소년의 미소가 걸려 있다. 며칠 전 6개 방송사 인터뷰를 한 뒤 몸살이 났고, 전날 밤엔 <달콤한 인생> 뮤직비디오 편집을 하느라 잠을 못 잔 때문인지 얼굴이 조금 탔다. 그런데 처음 보여준 소년의 미소 너머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에 깐 카드가 전부다. 옷을 갈아입고 넥타이를 바꿔 매고 접시에 올라온 베이컨 핫도그를 몇입에 다 썰어넣고 17만원짜리 휴대용 정수기에 담긴 알칼리성 물을 마시고 타르 1mg 담배를 피우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세 시간을 지켜보면서도 진맥이 잡히질 않는다. 이럴 땐 <범죄의 요소>와 <전쟁의 안개>에서 가르쳐준 교훈을 상기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이 돼볼 것.

1라운드, 땡. 수색전 차원에서 잽을 던졌다. <쓰리, 몬스터> 재미있게 봤습니다. 지체없이 맞받아치는 이병헌. “취향 이상하시네. 그런 걸 재미있게 보시다니.”

이 사내 꽤, 세다. 그럼 평이한 질문으로 우회로를 택한다. 8월부터 12월까지 촬영 마치고 한가했겠네요. “미국도 다녀오고, 보고 싶은 영화 DVD로 하루에 세편씩 봤어요. <미치고 싶을 때> 정말 좋던데요. <팻 걸>도 마지막에 뇌리를 세게 때리는 게 아주 좋았어요. 난 그런 영화들이 좋아요. 찬욱이 형(유일하게 형이라 부르는 감독) 작품도 좋지만, 김지운 감독 작품이 나에게 더 기질상 맞는 것 같아요.”

취향이 종잡을 수 없다. 이병헌 안에 들어 있는 소년(<공동경비구역 JSA>의)을 한번 꺼집어내볼까. 그런 얘기 들어봤냐고 물었더니.

“내 이미지가 이중적이란 얘기 들었는데, 그 이미지가 워낙 천지차이라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거예요. 그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제 그게 무슨 뜻인지 알 듯해요.”

1라운드 탐색전을 마친 소감. 그의 입장은 잔말 말고 영화 이야기로 곧장 들어가자는 게 아닐까. 영화배우는 영화로 이야기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완강한 태도를 해맑은 소년의 미소로 보여주지 않는가. 얼굴과 몸을 잘 감싼 커버링, 흔들리지 않는 스탠스. 상대방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웃음을 잃지 않은 채.

2라운드 첫 잽은 조금 구태의연하게. 선우는 누구인가요. 당신이랑 닮은 데가 있나요.

“7년 동안 강 사장의 손발이 되어서 개처럼 일한, 강 사장이 총애하는 넘버2죠. 매일 100점만 맞는 친구가 있는데 한번은 답안지를 밀려써서 50점이 나왔어요. 그럴 때 이 시험 전체를 포기하고 싶어지는 친구가 있잖아요. 노 게임. 다시, 이제부터. 안 좋은 기억은 쉽게 잊기 어렵지만, 그 원인제공자-흔적은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친구죠.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처음엔 왜 그렇게 됐는지 자기는 몰라요.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강 사장을 대면해요. 그때 아는 거죠. 그때 그 정서가 맘에 들어요. 선생님에게 총애받다가 밀려난 아이처럼, 선생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섭섭함, 내가 가장 믿고 따르던 사람으로부터!”

이병헌은 학창 시절 우등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우처럼 반항아까진 아니었다고 말한다. 괜히 뻘소리 해서 사람들 웃기고 그러기는 했지만. 마침 그 뻘소리 한 자락을 얻어 들었다. “이 영화는 읽기만 해도 재미있어. 줄거리가 그냥 대박이야. 김지운 감독은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감독이 주문한 건, 주인공은 폼이 나야 해, 였어요. 내가 형상화한 선우는 평소엔 깔끔하고 인텔리 느낌이지만, 문득 섬뜩한 게 느껴지는 사람이에요. 가령 앉을 때는 이렇게(순간 다리를 쫙 벌리고 팔을 쭉 내리며. 오셨습니까, 형님 하는 투의 앉음새). 감독님은 그런 건 다른 데서 하자 하시더군요. 강 사장 몰래 희수가 밀애하던 현장에서 선우가 희수를 바라보는 시선 같은 거죠.”

영화의 액션을 설명하면서 이병헌의 말은 더 호흡이 빨라진다. “김지운 감독이 욕심이 많은 분이 아녜요. 이제껏 봐오지 않았던 것, 짧아도 센 것으로 갔죠. 불각목 액션신 같은 건 여태껏 없었어요. 그걸로 얼굴 후려쳐요, 그런 게 어디 있었어요.”

영화 바깥으로 걸어나온 3라운드는 조금 심드렁하다. 나이 먹는 고민 없느냐고 했더니, 고민한 적도 없고 생각한 적도 없다고 한다. “세월이 가면 늙게 되어 있는 거고, 앞으로 할 거에 대해선 일부러도 생각을 안 해요. 생각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잽을 뻗어본다. 선우는 휴대폰 저장 번호 1번이 자기 일하는 나이트클럽이던데 1번 누르면 누가 나오나요. “전 저장 안 해요. 그런 건 여자들이 한다고 하던데.” 선우처럼 차갑다는 말 듣죠? “들을 때도 있는 데 그건 날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랑 더 친해요 아니면 강 사장 같은 나이 많은 사람? “많은 사람하고 더 친한 거 같아요.”

패를 더 보여줄 수 없냐고 했더니, 기대를 너무 많이 하고 온 게 아니냐는 카운터 블로가 날아온다. “나중에 늙어서 자서전 쓸 때 보여주려고요. 미리 얘기하면 재미없잖아요.” 이쯤 되면 백기를 들어야 한다. 나이 들면 늙는다는 이치를 거슬러올라가는 이 사내에게 질 건 명약관화. <달콤한 인생>에서 그가 보여줄 장렬한 추락을 보며 고소해 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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