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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안녕하세요? 스팸메일 보내는 분
박혜명 2005-03-18

회사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컴퓨터 켜는 일이다. 웅웅, 부팅되는 소리를 듣고 타다닥, 바탕화면에 아이콘들이 뜨는 걸 본다. 그리고 아웃룩을 연다. 거짓말 않고 100개 넘는 새 메일이 받은 편지함에 들어와 있다. 아련한 옛시절의 친구가 보낸 메일은커녕 내 기사 엉망이라고 시비거는 독자 메일도 없다. ‘신용불량에서 탈출하세요~ 빚 독촉 이젠 해방~ 개인파산신청’, ‘일반칫솔 No! 전동칫솔 6개가 9900원???’, ‘컴컴한 새벽 이런 게 필요하시죠?’ 더 볼 것도 없이 왼손으로 쉬프트키, 오른손으로 마우스 잡고 한번에 다 지우지만, 어쩌다 시간내서 자세히 보면 신기하고 놀랍다. 매번 다른 제목들, 매번 다른 보낸이의 이름들. 내 옆 책상 쓰는 동료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지 ‘정한석4’, ‘정한석12’가 보낸 메일도 있다. 하루종일 아웃룩을 열어두면 이런 스팸메일이 30분에 열댓개씩 꾸준히 들어온다.

아주 간혹 궁금할 때가 있다. 대체 저런 메일은 누가 보내는 걸까. 내 메일 주소를 찾아내고, 내 짝궁 이름도 알아내고, 그 이름 도용해서 어제도 보내고 오늘도 보내고. 내용은 같되 제목은 새롭고. 조사하고 보내고 고치고 보내고. 조사하고 보내고 고치고 보내고. 나와 쉼없이 소통하고 싶어하는 그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생긴 얼굴을 가졌나 호기심이 인다. 답장을 써볼까 한다. 보내주신 메일들 잘 받았어요. 당신은 좌절이란 걸 모르는 분이시더군요. 제대로 읽은 적도 답장한 적도 없는데 끈질기게 계속…. 사진 한장만 보내주세요.

물론 개인파산 신청할 지경에 이르렀거나 싼값에 전동칫솔이 사고 싶다거나 컴컴한 새벽에 ‘이런 게’ 필요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스팸메일은 그냥 스팸메일이다. 새로 온 편지 리스트가 다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묶어서 한꺼번에 지우는 것도 한두번이다. 모닝커피는 내가 좋아서 챙기는 일과지만 이건 강요된 일과 아닌가. 내가 바란 적도 없는 일과를 나보고 만날 하게 만든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나쁘다. 난 스팸메일 발신자들의 일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알고 보면 그냥 먹고살자고 하는 일일 것이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 일이 다행히 자기 적성에도 맞아 삶이 활기찬 사람이 있고, 적성엔 안 맞지만 다음달 카드값이 걱정돼 이번달 이직고민을 미뤄두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넓게 보면 일이라는 게 다 똑같다. 난 내 직업을 얘기할 때 ‘밤 새고 몸 축내고 월급 적은 일’이란 말 뒤에 ‘그럼에도 그것들을 상쇄할 만한 만족감을 내 일에서 찾고 있음’이라고 덧붙이지만 그래도 우리 엄마는 내 일을 100% 이해하지 못하신다. 대기업에 취직해서 내 것의 1.5배가 넘는 연봉과 추가 인센티브를 받고 사는 내 동생은 아침에 동료들과 생과일주스를 갈아마시며 까르르 담소를 나누고 저녁엔 생과일주스 멤버들과 재즈댄스를 배우러 간다. 거기에다 심지어 자기 일에 만족과 보람을 느낀다. 내가 스팸메일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엄마와 동생은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지루한 교사 일을 30여년간 해오신 엄마가 대단해 보이고, 갑갑한 대기업에서 버티는 내 동생이 신기하다.

삶은 대단한 목표를 갖고 사는 것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꿈을 갖고 계획을 세워 한 걸음씩 실천해가는 내 삶을 상상했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은 현재의 내 삶이 못생겨졌다 여기는 건 아니지만, ‘보잘것없다, 변변찮다’라는 말에 그렇게 부정적인 의도만 있는 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는 이유, 그걸 꼭 스스로에게 물어서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들으면 좋겠지만, 들을 대답이 있으면 좋겠지만, 꼭 지금 듣지 않아도 좋다. 며칠 전, 살아 있는 너구리의 뒷다리를 손도끼로 잘라버리고 생가죽을 벗기는 어떤 나쁜 중국 새끼들의 악한 짓을 인터넷 동영상으로 보면서 너구리와 비슷하게 생긴 우리집 강아지가 중국산 너구리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다행함과 감사함만 떠올려도, 삶은 당분간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