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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여성, 배우가 되고 싶어요!
2001-07-06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2 - 복혜숙 상

일본 기예학교 유학 도중 영화의 매력에 빠지다

복혜숙(1904∼82)은 한국영화사 초창기에 ‘여배우’라고 하는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길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가 데뷔한 1922년 무렵은 한국영화제작이 아직 활성화되기 이전이며, 연극무대에서 여자 역할을 모두 남자가 맡았다. 복혜숙은 ‘이화학당 출신 여배우’와 ‘기생 출신 여배우’로 일컬어지곤 하는데, 일면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는 이 수식어들은 여성 복혜숙이 그 시대를 살아온 흔적이다.

충남 보령 태생인 복혜숙은 감리교 목사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이화학당을 마친 뒤 수예교사가 될 목적으로 일본의 요코하마여자기예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나 영화와 연극의 매력에 흠뻑 젖은 ‘공인된 영화광’으로 바뀌었다. 귀국 뒤 극단 신극좌를 통해 본격적인 배우활동을 시작했고, 체계적으로 연기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에는 극단 토월회에 입단했고, 한국영화계가 제작을 본격화하던 1926년에 조선키네마의 창립작품인 <농중조>에 출연했다. 23살 때의 일이다. 나운규와 함께 공연한 이 작품을 통해 인기와 연기력, 미모를 겸비한 스타로 떠올랐으며, 대낮에 남자와 손목을 잡는 대담한 장면과 자유연애라는 주제 덕분에 해방된 신여성의 이미지를 대표하게 되었다.

해방 이전의 출연작은 총 12편이지만, 개런티가 없던 시기인지라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비너스 다방의 마담으로 나서 8년 동안 경영까지 맡았다. 이곳은 유명한 댄스홀이자 문화계의 명소 역할을 했다(김진송,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현실문화연구, 1999 참조).

해방 뒤에는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하여 후배 연기자들로부터 ‘어머니’라고 불리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몰이해와 굶주림, 멸시와 냉대의 가시밭길 속에서 거듭 탈출구를 찾아내며 평생을 여배우로 살아온 복혜숙은 생애의 마지막 해인 73살 때에도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스크린과 연극무대, 라디오 전파와 TV 화면을 오가며 광기들린 사람처럼 매혹되어 살아온 여성 예술인 복혜숙에게 배우로서의 55년은 직업이 아니라 차라리 예도(藝道)였다(이영일,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3). 이 글에서는 복혜숙의 활달한 성품과 자신감을 드러내기 위하여 인터뷰 당시의 말투를 그대로 살렸다.

아유, 맘대루 써. 욕을 해도 좋고 아무래캐도 좋아.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구, 사생활이고 뭐구 간에 상관없어. 내가 아홉달 만에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대요. 우리 아버지가 대천교회(충청남도 보령군 대천면- 필자) 목사였는데, 아버지가 계급도 없애구 제사도 지내지 말자고 그러니까 유림들이 들고 일어나고 경찰에 잡혀갔어. 어머니까지 감옥으로 붙들려갔대. 그때 감옥이란 게 흙바닥에 가마니 한장씩 깔구 있는 덴데 아이를 배고 있으니까 병이 안 나겠수? 겨우 풀어줘서 집에 와 애를 낳는데 애가 죽었더래. 날이나 새면 갖다 버릴라구 빨래에 싸서 웃목에 놔뒀는데 새벽녘에 거기서 뭐가 꿈틀꿈틀 하더래나?

그 담부터는 아버지가 선교하는 데 따라서 4년마다 돌아다니면서 살았어. 열두살 때까지는 어머니한테서 언문도 배우고 소학도 배우고 그랬어. 딴 선생한테 맹자도 배우고. 그때 우리 사는 목사관 뒤에 선교사관이 있어서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살았다구. 거기 꼭 고꾸상(요리사, 쿡- 필자)이 따라왔는데 그래두 내가 목사 딸이라고 커피를 줬어. 설탕을 넣어서 들큰하게. 그게 인이 백여서. 내가 나중에 다방 비너스 할 때, 오후 두세시에 일어나도 커피를 안 먹으면 잠이 안 깨는 거 같애. 그래서 커피를 대접으로 먹지 그냥.

영화 속 여주인공 동경, "나두 저런 여자가 돼봤으면"

어머니가 나 열두살 때 돌아가시고. 보리타작할 때쯤인가? 이화학당 보통과에 들어갔지. 거기를 서른일곱살 먹은 나인(궁녀의 일종- 필자) 출신 진설우라는 사람하고 같이 다녔어. 그래서 내가 궁중 법도를 좀 알아. 요즘 사극 찍는 거 보면 아주 가관들이 아니지.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그래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일본으루 유학을 갔지. 기예학교로. 거기가 수예 그런 거 배우는 덴데 요꼬하마에 있어. 요꼬하마에 아주 극장이 많아. 참 좋은 영화 많이 구경했다구. 한번은 영화구경을 갔다가 밤에 오는데, 사감 방을 지나가야 되거든. 그 사감 방 창문 밑을 살살 기어서 들어가려고 그러는데, 어찌 좀 이상해. 그래서 이렇게 올려다보니깐, 에구머니나! 창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어. (웃음) 그 담부터는 마음놓고 다니는 거야. 돈이 없어서 못 다니지.

거길 가서 동양 여자하고 백인하고 연애하는 영화를 좀 보는데, 아주 깨끗하고 그저 만나면 얘기하는 게 속삭임뿐이야. 근데 그 여자 연기가 참 좋아. 그 미소가 그렇게 이쁠 수가 없어. 나도 저런 여자가 한번 돼봤으면 좋겠다 그랬어. 제목? 제목은 몰라.

그러다가 동경 아사쿠사에 무용연구소가 생겼단 소릴 들었지. ‘사와 모리노 현대무용연구소’라구. 내가 거길 갈라구 기예학원 선생한테 거짓말을 했어. 조선으로 돌아간다고. 그러고는 동경으로 내뺐지.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동경에 와서 석달 동안이나 나를 찾아 헤맸대. 나는 나대로 사와 모리노 가서 석달 동안은 그저 밥짓고 소제하고 밤낮 그런 것만 하고. 그래서 맨날 몰래 가서 문틈으로 들여다보고 그랬지. 석달이 지난 다음에 겨우 저 맨 뒤에 서서 남 하는 대로 따라서 해보고 그랬는데. 잘 못하면은 채찍으로 때려요. 그거 맞고 나면 여기가 뱀 지나간 것처럼 된다구. 그래두 아픈 줄 모르고, 그저 와서 배우라는 말만 좋아했지.

“따귀 맞다 연극 다 해먹겠더라구”

결국 아버지한테 끌려서 조선으로 돌아왔지. 그때 아버지가 강원도 김화에서 학교를 운영했는데 나를 거기 선생을 시켰어. 학교선생 노릇을 달 하다가, 도망했지. 싫어서. 그때는 연극하고 싶지. 그리고는 서울 단성사에 가서,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참 그 ‘무작정 상경 소녀’처럼 말이야, “일본서 공부허다가 완 사람인데, 연극하는 사람 누구 있으면 좀 소개를 받을라구 그런다”니깐드루, 김덕경(변사- 필자)씨를 보여줘. 그래서 인제 변기종씨하고 이경환씨하고 만나게 됐지. 그때가 열아홉살 땐가, 스무살 땐가?

그렇게 해서 신극좌 들어갔는데, 그때 김도산(극단 신극좌의 대표로서 1919년에 연쇄극 <의리적 구투>를 제작했다. 연극공연 도중에 일부 장면을 미리 찍어둔 활동사진으로 보여주는 연쇄극은 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될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필자)씨는 아파 누워 있었다구. 나 들어가자마자 며칠 안 돼서 죽었어. 신극좌에서 젤 처음 <오호천명>(嗚呼天明)을 허구, 연쇄극 뭐 이런 거 했어. 내가 <의리적 구투>에도 모가지만 나와봤다구. 김도산 죽은 다음에도 <의리적 구투> 많이 했어. 레파토리루다가.

이제 그렇게 연극을 하면서 따귈 몇번 맞다보니깐 억울해. 내가 일본서 볼 적에는 대본 독회를 하고 그러더란 말이야. 거기선 의례 레파토리가 바뀌려면 대본연습부터 하잖아? 근데 이건 대본도 없이 입으루 가리쳐주군 말이야, 대사 잊어버렸다구 따귀 때리구, 또 동작 잊어버렸다구 따귀 때리구, 따귀 맞다가 연극 다 해먹겠더라구,

그래서 내가 메칠 들어앉아서 <누교>(淚橋)를 번역을 했다구. 그게 내가 일본서 본 건데 자유연애 얘기지. 원래 <대위의 딸>이래는 거, 그건데 <누교>는 한막을 더 붙여서 다리에서 만나 연애를 하구 그러는 거지. 근데 연애하는 사람이 배신을 하구 다른 데 장가들겠다니까 그 집에 불을 질러요. 그래가지구는 그 다리에 서서 그 불나는 걸 보면서 “잘 탄다, 잘 탄다” 하면서도 울고 그러는 거야. 그래 지금까지 잊어버리지도 않아. 그거 내가 번역하구 내가 주연을 했다구. 아주 히트했어. 한번 그렇게 시험으로 썼더니 자꾸 날더러 쓰래. 그러니까 겁이 나. 못 쓴다구 그랬지.

그러니 체계적인 공부가 하고 싶더라고. 마침 현철씨가 일본서 오셔가지구 조선배우학교를 하신대길래 거길 들어갔지. 현철씨는 무대하고 분장까지 전부 다 맡아 가르치시고. 이구영(영화감독- 필자)씨는 영화 총론이니 개론이니 뭐 강의하시구. (조선 배우학교에서는 1925년 9월 입센의 <인형의 집>을 공연했는데 이때 복혜숙은 주인공 노라로 출연하여 호평받았다. 공연 당시의 복혜숙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필자)

그동안에 사는 고생은 말도 못해. 그땐 배우도 개런티니 뭐 그런 거 없어. 그때는 하루에 10전을 줘. 교통비 하라고. 그럼 그거 5전으로 호떡을 하나 사서 두끼를 먹고 또 5전으로는 전차타고 다니고. 내가 나중에 ‘비너스’ 할 때 커피 10전 하구, 홍차 8전을 했으니 알 만하지.

배우학교에 다닐 때 이서구씨가 와서 토월회(1923년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연극단체. 주로 번역극을 소개. 복혜숙은 토월회 전성기인 1925년부터 활동했다.- 필자) 하자 그래. 그때 토월회가 광무대를 썼는데 난 일년 내내 거기 서 있었지. 연기는 여기서 다 배왔어. <춘향전>을 제일 많이 했지. 장기공연에 재상연에 전국 순회공연에. 그때 광무대 그 언저리 여관들이 전부 돈벌었다 그래. 시굴서 가식(가족- 필자)끼리 모두 올라와서 보구 묵느라구들.

연극하고 이렇게 댕길 적에 윤백남씨가 오셔서 “영화를 하나 맡았는데 너 나와서 좀 해라” 그러더라구. 그게 인제 <농중조>(籠中鳥)야.

정리 최예정/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이영일프로젝트 연구원

shoooong@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