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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종도 2005-03-25

안톤 슈나크의 글을 읽은 건 열여섯살 때, 세월의 묵은 냄새 나는 헌책방에서였다.

16살.

민증 좀 까보라며 테이블로 다가오는 술집 주인의 굳은 입매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인사 안 하고 지나갔다고 박박 우기며 가던 길 되짚어와서 곤봉을 휘두르는 선생의 주름진 이마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내 편지를 받고 답장은 내 친구에게 보낸 부반장 여자아이의 해맑은 웃음. 시험 전날 밤 저녁 먹자마자 찾아오는 식곤증, 이윽고 희붐하게 동터오는 햇살 아래 빛나는 수학정석, 거기 위에 말라붙은 침자국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26살.

누군가 네 여자친구의 진짜 남자친구는 다른 사람이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을 때, 고대하고 고대했던 첫 키스를 했지만 입만 얼얼하고 턱 관절만 뻐근할 때, 나를 걷어찬 여인이 유월의 햇살 아래 남자의 훈장마냥 가슴에 안겨 거리를 활보할 때. 부도덕할수록 애간장이 타는 모든 남녀상열지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랑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 뒤늦은 깨달음을 안주로 삼는 술잔이 우리를 취하게 한다.

아버지에게 함부로 대들었다가 힘에 밀려 슬리퍼도 챙기지 못하고 다방으로 도망치다. 어머, 사모님이랑 아침부터 한판 하셨나봐요. 때이르게 듣는 존칭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36살

설경구가 내 흰머리만 보고선 편집장인 줄 알고 벌떡 일어서려 했을 때, 이병헌이 많은 인사말 가운데 유독 머리가 희시네요로 첫인사를 골랐을 때, 거울 앞에서 내 정수리가 점점 민둥산이 되어가는 걸 볼 때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감독이며 배우들이 강북은 불편하다고, 청담동에서 인터뷰하자고 하면 3호선을 타고 내려 한참을 걸어간다. 아내를 위해 무리해서 이틀을 연속 했다는 내 글을 40대 감독이 잘못 읽고선, 술 취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 너 하루에 두번씩 한다며. 수컷의 질투로 시작된 드라마는 늘 죽음으로 끝나는 운명, 고작해야 오해와 질투가 그 내용인 인간의 보잘것없는 운명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인터뷰가 끝나 카페를 나오면 배우들은 스타크래프트를 타고 사라지고, 나는 추적거리는 빗줄기 속으로 걸어가야 하는 엇갈린 운명이 또 나를 슬프게 한다. 3호선으로 북상한다. 전철 안에서 읽다 만 <무기의 그늘>을 편다. 죽기 전에 누구에게 제일 먼저 너의 죽음을 알리고 싶냐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사의 질문이 뜨끔하다. 데스크에 먼저 알려야겠지. 이번 기사는 마감하지 못할 것 같은데요. 이런 생각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한강대교 위로 긋는 빗방울이 전철 창가에 부딪혔다가는 사라진다.

그리고 회사에서 나를 기다리는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커서. 노트북 상단 왼편에서 눈을 껌뻑이며 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그녀는 만족을 모르는 포식자. 나는 세헤라자데가 되어 이야기에 굶주린 그녀의 허기를 채워주어야 한다. 일주일에 몇 꼭지씩 넘겨주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그건 정한 이치고, 이 정한 이치라는 게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나는 입을 뗀다. 옛날 옛적 바닷가 왕국에 왕이 살았습니다. 18년간 나라를 다스리던 왕은 뜬금없이…(이하 이 부분은 사법부에 의해 삭제명령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