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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 X-파일 [2]
오정연 2005-03-29

“아리랑 찾아 삼만리”

<아리랑>을 둘러싼 오랜 추격전

영상자료원 이사장 D씨가 <아리랑>을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진 기이한 수집가, 아베 요시시게를 방문하여 설득에 나섰다. 필름을 넘겨달라 말하면 “남북한이 통일되는 그날 반환한다”는 대답이 돌아오고, 필름을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면 소장 필름이 너무 많아 불가능하다, 5만편에 달한다는 그 소장 필름을 대신 정리해주겠다고 나서면 소장 장소가 4군데에 걸쳐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 과연 개인이 그렇게 많은 필름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허술해 보이는 그의 소장필름 리스트는 믿어도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온갖 필름 캔들이 집안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을 봤을 때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보존 상태는 신뢰할 수 없어 보인다. 일단 소득없이 귀국할 수밖에. 94년부터 갑자기 방송 3사를 비롯해서 여러 민족주의자 단체들이 <아리랑>을 찾아 아베를 찾았다고 한다. 일본의 정보원이 그에게 안부전화를 넣었더니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가 성질을 부리더라는 말을 전한다. D씨는 이런 상황이라면 자료원은 일단 뒤로 물러나 있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리랑

한국 영화사의 미스터리였던 <아리랑>의 행방은 10여년 전, 아베 요시시게가 프린트를 소장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구체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의 소장목록 리스트에 <아리랑>이 있다는 것만을 확인해줄 뿐 그 이상의 협조는 거부했던 아베의 태도. 영상자료원과 방송사, 개인수집가와 민족주의자 단체, 영화연구가와 나운규 유족회 등 숱한 개인과 단체들이 <아리랑>을 찾아 아베를 찾으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아무런 진전이 없자 일각에서는 가장 앞장서야 할 영상자료원이 너무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아리랑>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자부하는 영상자료원쪽은 현재, 아베가 <아리랑> 완본을 갖고 있을 확률은 10% 이하로 보고 있다.

아베가 지난 2월 사망한 뒤, 일본의 아카이브는 상속인 여부를 확인한 뒤 아베의 수집품을 일일이 확인하여 10개월 이내로 대답을 주겠다고 약속한 상태. 영상자료원은 이를 기다리면서, 중국이나 러시아에 <아리랑>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알아보는 중이다. <아리랑>이 중국에서 상영된 바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쪽의 확률이 더 높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장광헌 수집팀장은 지금도 앞뒤 모르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 “<아리랑> 좀 빌려달라”고 요구를 해온다며 허탈하게 웃는다. “그럴 땐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서 복장이 터진다. 일제시대 한국영화가 <아리랑>밖에 없는 건 아니잖나. 우리로서는 한편의 <아리랑>뿐 아니라 발굴 가능한 수많은 다른 영화들도 중요하다. 원래 자료는 수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섣불리 가능성을 점칠 수도 없고, 쉽게 포기해서도 안 된다. 조금만 느긋하게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심봤다, 심봤어!”

쓰레기 속에서 진주를 찾는 자료 발굴 현장

폐관 직전의 국도극장이, 건물을 허물기 전 창고에 보관 중인 필름을 가져가라고 연락을 해왔다. 수집보존실 E씨를 비롯한 몇몇 자료원 직원들에게 출동명령이 내려진다. 건물 꼭대기에 자리한 창고 안은 마구잡이로 널브러져 있는 필름 캔이며 영화 포스터들로 난리법석이다. 불도 안 들어오는 창고 안의 거미줄을 헤치면서, 캔들을 꺼내는데 어찌나 녹이 슬어 삭았는지 집어들기만 해도 푹 꺼져버릴 지경이다. 오래된 필름이 부패할 때 나는 신 냄새는 숨이 턱턱 막힌다. 자료원에 돌아온 E씨는 2.5t짜리 탑차에 가득 싣고 온 잡다한 쓰레기를 모두 펼쳐놓는다. 진짜 일은 이제부터다. 일단은 부식된 캔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외국영화로 보이는 것들은 젖혀놓는다. 남아 있는 한국영화의 대부분은 제목도 알 수 없기 때문에 필름을 일일이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출연배우와 대강의 내용을 확인해서 자료원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는 식으로 제목을 유추하는 것이다. 몇 백편의 영화 중 이 과정을 통해 새로 발견된 자료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 이제는 일일이 그것들을 늘어놓고 조각을 맞추는 일이 남았다. 적게는 대여섯개 많게는 열개 가까운 롤이 모두 모여서 완본을 이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운이 좋으면 2, 3개의 롤이 빠진 채로 소장 중이던 영화의 모자란 조각을 완성시켜줄 롤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국내 90년대 말. 멀티플렉스 붐으로 단성사, 피카디리, 국도극장, 국제극장 등 오래된 영화관들이 폐관 혹은 개보수를 위한 공사를 결심하던 당시, 영상자료원 사람들은 폐쓰레기 처리반처럼 불려다녔다. 환경폐기물로 분류되는 필름을 폐기처분하기 위해서는 1t당 100만원(영화 한편에 해당하는 프린트 한벌의 무게가 평균 30kg 정도)이 필요한 상황에서 보통 극장주들은, 창고 안에 있는 필름을 통째로 가져갈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남들에겐 쓰레기더미에 불과한 잡동사니 속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자료원의 운명이니, 대량으로 필름을 폐기하겠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달려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관떼기(1관=3.75kg)로 밀짚모자 공장에 팔아넘겨지던 필름더미들을 구출(?)해서 뒤지는 경우도 허다했던 자료원 초기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라 위안을 삼으면서.

보관소에 들어가기 전 까다로운 확인과정을 거치는 필름들.

그나마 귀중한 필름을 발굴하더라도 문제는 엉망진창인 보존상태다. 수집보존실의 이석휘 실장은, 되는 대로 감아서 캔 속에 쑤셔박혀 있던 필름을 일일이 프레임별로 복구하고 세척과정을 거쳐 영사 가능한 상태로 만들었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영화의 내용이나 완성도가 아닌 필름의 상태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입장은 일종의 직업병을 초래하기도 한다. 몇번이고 두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영화라 할지라도 누군가 “새로 들어온 그 영화 재밌어?”라고 물어보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마는 것. 그럴 땐 “그 영화, 상태 좋아?”라고 물어봐주면 좋을 텐데 말이다.

해외 국내에서는 더이상 획기적인 필름 자료의 발굴은 없을 것이다. 좀더 중요해진 것은 해외 아카이브들과의 협력관계. 영상자료원은 1985년 FIAF 정회원으로 가입한 이후, 1년에 한번 정기적으로 열리는 FIAF 총회에 참석해왔다. FIAF 총회를 비롯한 각종 국제아카이브 회의들은 특정 주제로 열리는 세미나들뿐 아니라 각국의 아카이브 관계자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중점 교류국가는 일본, 중국, 그리고 러시아. 이효인 원장 취임 이후에는 특히 중국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중국전영자료관의 천징량 관장은 “북한영화든 남한영화든 상관없다. 한국영화라면 무엇이든 넘겨주길 바란다”며 열성을 보인 이효인 원장에게, “그간 만났던 한국의 영상자료원장 중에서 당신 같은 연구자는 처음”이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런 신뢰관계가 빚어낸 것이 3월 초에 있었던 일제시대 영화 발굴상영전이다. 이때 상영된 9편의 영화 중 4편의 극영화가 모두 중국에서 건너왔다. 연구정보화실 박진석 실장은, 북한을 의식한 때문인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중국이 이처럼 급격하게 한국과 가까워진 것에 대해 오랫동안 중국과의 관계에 신경을 썼던 일본 관계자들이 다소 절망하는 눈치라고 귀띔한다.

한편 해외 아카이브와의 교류와 관련해, 80년대 초까지는 영화보존의 선진국으로 알려졌던 북한의 관계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귀한 자료들을 북한에서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진석 실장은, “북한이 그 어떤 나라보다도 중요한 협력 파트너임은 분명하지만, 북한이 국내사정으로 인해 최근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지 않게 된 것이 문제”라고 설명한다.

“파리 날리는데 계속 틀어요?”

한국 고전영화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

한국 에로영화 기획전을 준비한 시네마테크팀 F씨. 보통 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열었던 장르전과 달리 이번엔 언론 홍보도 확실하게 됐다는 자신감에 내심 뿌듯하다. <씨네21> 같은 영화지는 물론, 시사주간지에서까지 기획으로 다뤄줬으니 이제 곧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겠지. 혹시나 자리가 모자라면 어쩌나, 갑자기 조급함이 밀려들어 E씨는 보조의자까지 미리 준비해놓는다. 하지만 웬걸. 막상 영화제는 시작됐는데, 이건 예전 액션영화나 멜로영화, 공포영화를 틀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저조한 참여율이다. 아아. 믿을 건 영화사를 공부하고 있는 단짝친구뿐이다. E씨와 그의 친구, 둘만을 위해 자료원의 외로운 영사기가 돌아가는 비극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만주의 무법자" 기획전 포스터

자료보존부에 근무 중이던 오성지씨는 이효인 원장의 취임과 함께, 새로 만들어진 시네마테크팀으로 보직을 옮겼다. 명감독, 명배우전 위주로 비슷비슷한 영화만을 소개하던 기존의 프로그램을 혁신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액션, 에로, 멜로, 공포 등의 장르전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멜로영화전 등의 기획전이 지난 한해,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났다. 소장자료의 활용보다는 보존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아카이브의 특성상 그의 작업에는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보유 필름이라 해도, 달랑 프린트 한벌밖에 없는 필름은 훼손시 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영을 포기해야 한다. 영상자료원이 1년의 프로그램을 미리 짜는 것은 필름 수급 상황을 미리 파악해서, 영사가 가능하도록 복원작업을 완료하기 위해서다. 이런 노력이 전달된 것일까. 조영정씨는 영상자료원이 첫 번째 장르전을 기획했을 당시의 반가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일종의 발상의 전환처럼 느껴졌다. 이제야 비로소 대중적이면서도 체계적인 한국영화 소개가 이루어진 셈이다.” 30, 40년 전 일반인이 열광했던 대중영화, B급영화를 다시 보는 그러한 기획전을 통해 한국 고전영화도 우리 시대의 대중에게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조영정씨의 기대. 그러나 행사 주체인 오성지씨는 밖에서 체감하는 변화에 비해 관객 수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평일 2시, 1회에 그쳤던 상영회가 현실적으로 일반인들이 참여하기에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오후 5시와 7시30분을 추가해 3회 상영으로 조정했건만 달라진 건 없었다. “영사기사님이 만날 물어요. 관객 한명뿐인데 상영해야 하냐고. 그나마 그 한명마저 도중에 나가버리면, 황당하죠.” 웃으며 말하지만, 그 심정이 오죽할까. 기껏 새 프린트로 어렵사리 구해온 수작이 관객에게 외면당할 때의 슬픔은, 어쩌다 외국 고전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꽉꽉 들어차는 상영관을 볼 때 더욱 배가된다. 이를테면 지난해 6월에 있었던 이마무라 쇼헤이전은 보조의자도 모자라 상영관 문을 닫을 수도 없을 정도로 관객이 많았다고.

“이래봬도 우리가 왕년에는∼”

원로영화인들의 구술연구- 연구활동이 보강된 영상자료원

팀원들과 함께 원로영화인들로부터 50, 6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구술을 받고 있는 영화사연구팀 G씨.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도움이나 되겠냐며 손사래를 치는 한 여성영화인을 겨우 설득했던 G씨는 다른 팀원이 대신 갔던 그 인터뷰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는 말에 고민에 빠졌다. 혹시 그 팀원이 여자였던 것이 문제였던 것일까. 과연 효과적인 구술을 위한 첫 번째 노하우는 ‘이성’(異性)이라는 말을 기억했어야 했다. 남자인 G씨가 나서자 그분의 태도는 돌변한다. 물론 어려움은 여전하다. 어쩐지 예비접촉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 싶더니 막상 정식 인터뷰 일정을 잡으려 하면 “뭐? 또 오겠다고?”라며 마음을 졸이게 만들지 않나, 갑자기 “조명기는 왜 없냐?”고 나서질 않나, 여간해선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수확은 컸다. 이미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모 영화인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서 “충무로 모 다방에 자주 나타난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으니. G씨는 다음날부터 충무로로 출근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영화사연구팀은 시네마테크팀과 함께 새로운 영상자료원의 시스템과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서다. 단순한 보존에 그쳤던 자료원의 기능에 의미있는 활용을 덧붙이는 것이 이 팀들의 몫이다. 영화사연구팀은 자료원의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한국 영화사와 관련한 서적을 발간하거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 지난 2월에는 <한국영화를 말한다: 1950년대 한국영화>와 <한국영화사 공부: 1960-1979>, 두권의 책이 출판됐다. 이중에서도 <한국영화를 말한다…>는 다양한 포지션에 있는 22인의 원로영화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은 책. 이 작업의 실무를 총괄했던 영화사연구팀 정종화씨는 “과거 영화평론가 이영일씨가 원로영화인 구술결과를 담은 <증언록>이라는 책을 낸 적은 있지만, 이처럼 독립 기관이 영화사 관련 구술작업을 진행한 것은 최초일 것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론 중 구술은 한 개인의 체험과 선택적인 기억을 드러내는 미시사적 접근법이다. 한국 영화사의 경우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구술은 일종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자신들의 증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어르신들을 설득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지만,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면 카메라의 존재도 잊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라고. 그러다보면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던 원로영화인의 근황을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정종화씨에 따르면, 앞으로도 구술작업과 기획다큐멘터리 제작은 계속될 예정이다. 영화사연구팀이 최근 완성한 네편의 다큐멘터리는 3월 안에 자료원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뒤, 10월쯤에는 시사실에서 상영회를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