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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엄마>의 고두심

10년 전 여름, 대학로의 한 극단 연습실에서 배우 고두심을 처음 만났다. 제주 4·3 항쟁의 소용돌이를 지나며 신산스런 삶을 살아온 한 여인의 삶을 그리는 <느영 나영 풀멍 살게>(너하고 나하고 풀면서 살자라는 뜻)라는 연극이었다. 그의 고향이 제주도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고, 그렇다면 가족사에 뭔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싶었고, 혹시라도 그런 게 있다면 기사 쓰기 좋겠다는 욕심부터 내면서 찾아갔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마을을 불태우려는 것을 막으려던 친할아버지가 지붕 위에서 불타 돌아가셨습니다. 4·3의 응어리는 제주도민 전체의 것이죠.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역입니다.”(그는 이 연극으로 4·3에 대한 생각이 두터워졌고 그뒤로 4·3 때 추모제에 가서 사회를 보는 등 봉사를 해오고 있다.)

10년 만에 다시 만나면서 또 지레 욕심부터 냈다. (착한) 며느리와 (억척스런) 어머니는 고두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지 오래. 너무 일찍 ‘여인’을 잃어버린 그에게 감춰진 ‘여인’을 드러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의상, 메이크업, 헤어디자이너가 모인 자리에서 다소 단호하게 주문했다. “…음, 저…. 다가가고 싶은 누님의 이미지로 꾸며주세요.” 다들 눈이 좀 커진다. “다가가고 싶은?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음, 다가가서 만지고 싶은 누님이란 뜻이죠.”

배우 고두심은 어머니의 천성이 인처럼 배어 있었다. 일단, 두말없이 이 철없는 (아들 같은) 주문을 덜컥 받아주었다. 걱정이 전혀 없는 건 아닌 듯했다. 아주 간간이 한마디씩 한다. “이런 옷은 시상식 때도 입지 않았는데….” “이런 사진 젊었을 때 찍었으면 좋잖아. 늦게 맞아서 좋을 게 뭐 있어. 이런 건 빨리빨리 맞아야 하는데, 그래야 용서도 되고. 이거 용서가 안 될지도 몰라.”

“그렇게 안 야해요”라고 거듭 안심시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고혹적인 여인’의 욕망을 끄집어내리라, 는 야심이 얼마나 기도 안 차는 일이었는지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품에 폭 안겨, 쌓인 서러움을 울음으로 털어내며 어떤 응석을 부려도 넉넉하게 받아줄 어머니의 연륜과 여유와 멋을 체화하고 있었으니까. 그에게 고혹적인 매력이란 너무 단편적인 것이어서 오히려 그의 고유한 멋을 깎아내릴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반항적이고 도발적이라는 단어가 어떤 점에서는 발전적이고 나아가서는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것과 연관되지만 내 개인적인 자세는 굉장히 고루하고, 순리껏 사는 거다. 고여 있는 것이 많다. 도발적이고, 반항적인 거 내 안에는 별로 없다.”

물이야 고이면 썩지만, 여인 고두심에겐 고이면 고일수록 그게 성찰이 되고 지혜의 겹이 되어 사람의 향내로 바뀐다. <인어공주>의 고두심은 예쁘고 설레는 전도연, 박해일의 로맨스에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리얼리티였다. 그냥 억척스런 어머니만은 아니었고 <인어공주>를 강단있는 영화로 만드는 기둥이자 장치였다. <엄마>의 고두심은 <인어공주>처럼 ‘센’ 어머니는 아니지만 영화의 굳건한 기둥이 되는 또 하나의 리얼리티다. 영화는 판타지와 익살과 수다를 쉴새없이 쏟아내지만 그게 공허하거나 허탈하지 않은 건 전적으로 고두심이란 기둥 덕분이다. 익살과 수다는 어머니 고두심과 만나 생명력을 얻으며 슬픔으로 바뀌곤 한다. 땅에서 발만 떼도 머리가 뱅뱅 도는 어지럼증 때문에 막내딸 결혼식장을 향해 3박4일 동안 남도의 아름다운 들녁을 걷고 또 걷는 로드무비 <엄마>는 극중이나 극 밖에서 늘 어머니이기로 작정한 고두심에게 아주 멋진 선물이다.

고두심을 읽는 키워드 4가지

엄마와 여인 지금 와버렸으니까 그냥 엄마로 불려지기를 바라지. 내 틀에 그렇게 딱 박아놨거든. 어떤 걸 택해도 억울하긴 억울해. 결혼을 해도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하듯이. 선택이라는 것이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니까 억울한 것 같지. 근데 그 억울함이 너무 커서 자기 삶을 짓누른다면 얼른 바꿔야겠지만 그렇게 불편하지 않고 더러더러 문득문득 바람과 같이 왔다간다면 둘씩이나 취할 수 있기란 곤란하지 않나. 일이냐 사랑이냐고 한다면 어느 한쪽에 비중을 둬왔고 해왔다면 만족할 줄 알아야지. 물론 아쉽다는 생각은 하지만 둘 다 가지려고 막 애쓴 건 없어. 이 다음에 또 태어난다면 해봤으니까 다르게 살아보겠지만.

감각의 발견 느끼는 거. 느낀다, 라는 단어가 참 좋아. 누구의 손을 잡으면 따뜻하거나 거친 것. 쭈글쭈글한 노인들의 손을 보면 살아 있는 역사 같고, 그 손에 신뢰감이 가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 밥과 요 밥이 다르다는 느낌 자체가 좋다. 싫다, 그립다, 좋다라고 말하는 건 느끼는 것이고 살아 있다는 것이지. 시간이 나면 하루종일 화단 가꾸는 걸 즐기는데 다른 생각은 안 해. 조그만 꽃, 잡풀 같은 꽃을 보면서 그 생명력에 감탄하고 신기해하지. 거기에 어떤 삶의 의미까지 담아서 크게 생각하지는 않아. 내가 없어져도 세상이 잘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면 참 신기해. 내가 엄마가 아니어도 그 자리를 다른 엄마가 대신할 테고.

누드 누드라는 게 그래. 누드를 찍는 모델이랄지 배우랄지 특별한 직업으로 봐줘야지. 인기에 편승해 누드 찍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그렇고. 못 찍을 것도 없고 찍었다고 탓하는 것도 아닌데 결과가 나왔을 때 아름답게만 보여지면 상관없어. 그런데 외국 잡지하고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되게 나오는걸. 이렇게 찍으려면 왜 벗었어 하고 얘기하게 돼. 동양인은 서양인과 다르고 동양의 뭔가 있는 걸 잘 잡아내기만 하면 누드 찍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나.

영화 <엄마> 시나리오 읽었을 때 판타지처럼 안개 자욱한 예쁜 동화 같은 느낌이었는데 영상으로 처리해야 하는 매체라 그 느낌을 그대로 그림으로 잡아내지는 못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이라든가 관계에 대한 깊이는 더 있을 수 있어. 시나리오 첫 대목에 온갖 길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사람의 삶 자체가 길이잖아. 요 자리에서 이렇게 발을 떼면 이런 삶이 되고 저렇게 되면 또 다른 삶이 되듯이. 이것이 삶이야. 삶 자체가 이래. 그걸 보여주고 싶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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