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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정훈이를 만나다 [1]
사진 오계옥김혜리 2005-04-26

<씨네21> ‘만화 vs 영화’ 연재 열돌 맞는 만화가 정훈이 인터뷰

10년을 한결같이, <씨네21>의 골키퍼, 정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고 소설도 있지만, 바람 잦은 인생에서 마지막 춤 따위를 감히 누구와 기약할 수 있으랴. 그래도 <씨네21> 열살 생일 축하파티의 첫 번째 춤만큼은 꼭 이 남자와 추고 싶었다. 편집장이 네번 바뀌는 동안에도 두 페이지의 텃밭을 한결같이 장악해온 행복한 영주, 그의 만화 때문에 잡지를 산다는 독자들의 쇄도하는 고백에 어느 감독이나 평론가보다 <씨네21> 기자들이 질투하는 만화가 정훈이가 그 사람이다. 1995년 <영챔프>가 주관하는 제2회 신인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해 <씨네21> 제9호에 인터뷰가 실린 것을 인연으로, 정훈이 작가는 <씨네21>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1996년 초 본격적인 매주 연재에 돌입해 500호를 눈앞에 두고 있다. 24장의 프레임으로 1초를 이루는 영화를 닮았는지, 스물세칸 내지 스물다섯칸에 걸쳐 하나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그의 만화는 자칭타칭 <씨네21>의 ‘전원일기’가 됐다. 통상 패러디로 불리지만 매서운 조롱이나 독설의 기운은 ‘정훈이 만화’에 없다. 봄날의 양지처럼 따사롭고 유유자적한 ‘정훈이 만화’의 세계는 그냥 영화의 친구다. 그는 굳이 영화를 해석하거나 뒤집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영화 옆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가끔씩 수작을 걸며 나름대로 즐거운 마을을 가꾸어갈 뿐이다. 일산에 자리한 정훈이 작가의 호젓한 작업실을 찾아 조그만 10주년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함께 끄고 긴 티타임을 나누었다.

-<씨네21> 연재만화가 10년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을 언제부터 품었나.

=처음에는 5년만 하자 마음먹었는데 훌쩍 흘러갔다. 10년을 넘기면 집착이고 노망이다 싶었는데 어느새 10년이다. 10년 동안 제일 꾸준히 들었던 이야기는 “요새는 재미없더라”는 말이다. (웃음)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 같다. 안타치는 날도 삼진당하는 날도 있는 게 인생이지 생각한다.

-창간 초기 마감을 끝내고 사무실을 나가다보면 초췌한 얼굴로 만화 원고를 들고 온 당신과 엇갈리곤 했다. 10년의 마감 사연도 파란만장하겠다.

=연재 초기에는 경남 창원에 살았기 때문에 월요일에 그려서 화요일에 특급우편으로 원고를 부쳤다. 그런데 언젠가 술 먹고 놀다가 화요일에 원고를 못 보내고 말았다. 다급히 아버지께 고하고 비행기 값을 얻어 수요일 아침에- 오후 6시에 편집실 닫는 줄 알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덕분에 비행기도 처음 탔다). 점심 무렵 한겨레신문사에 도착하니 담당인 오은하 기자가 “어머, 뭐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라고 어쩔 줄 몰라하며 목요일에 받아도 된다는 충격적 사실을 누설했다. 그뒤로는 목요일 6시까지 원고를 납품했는데 조금씩 데드라인의 정체를 알면서 마감이 늦어졌다.

-다 완성해놓고 망친 경우도 있나.

=거의 다 그려놓고 이야기가 꼬인 걸 깨달을 때는 미련 갖지 못하게 아예 지워버린다. 컴퓨터가 느리던 시절에는 완성해놓고 저장을 완료하지 않은 채 잠들어서 사고가 난 적도 있고 일어나보니 기남이 얼굴이 까맣게 칠해져 있기도 했다.

-10년 동안 딱 두번 연재를 펑크냈다.

=<트러블 삼국지>로 사흘 밤 새고 <씨네21>을 마감하던 날 작업이 잘 안 풀려서 책상에 쓰러져 좌절한다는 것이 그냥 잠이 들었다. 아침 새소리에 눈을 떴다. 죄송해서 그냥 “마감하다 쓰러졌다”고만 말했는데 마침 오은하 기자도 과로로 쓰러지는 바람에 <한겨레노보>가 “만화가와 담당기자 같이 과로로 기절”이라고 이슈화했다. (웃음) 다음주 마감 때 찾아가니 기자들이 모두 다정히 걱정해줘서 가끔 펑크낼 만하다 싶었다. 두 번째는 2004년 3월 노 대통령 탄핵사태가 있던 주였다. 도저히 마감 못하겠다고 미리 통보하고 집회에 나갔다.

정식 만화 수업 대신 ‘나홀로 수련’

<무사>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창원에서 주로 성장했다. 어떤 도시였고 어떤 유년기였나.

=6살 때 이사간 창원은 전국 각지 사람이 모여든 공단도시였다. 도로부터 쭉쭉 뻗은 계획도시라 평양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무대가 되기 일쑤였다. 어려선 뛰어놀기를 하도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아주 날씬했다. 장래희망을 어른들이 물으면 아버지 소망대로 “검사요” 했지만, 뒤돌아서서는 “과학자 돼서 태권브이 만들어야 하는데!”라고 독백했다. 한동안 육군사관학교를 선망했지만 중·고등학교도 남학교를 다닌 터에 대학교는 남녀공학을, 그것도 여학생 많은 학교를 가야지 사관학교가 웬말인가 싶어 미련을 버렸다.

-<씨네21>에 기고한 칼럼에 의하면 13살에 본 호러영화가 영화에 빠진 첫 번째 기억이다. 호러영화의 어떤 면에 끌렸나.

=평소에 전혀 볼 수 없던 판타지, 새로운 세계가 준 문화적 쇼크였다. 영화 보는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호러에 빠져들어 동네 재개봉관에 <터미네이터>가 개봉됐을 때도 제이슨, 프레디를 잇는 새로운 살인마인 줄 알았다.

-고등학교 시절 메탈밴드에서 활동했다는 전설이 있다.

=5인조 밴드 ‘아파치’였다. 싱어도 했지만 3학년 때는 드럼을 쳤다. <젊은 미소> 부르는 1학년 시절엔 노래도 가능했지만 학년이 오르면서 메탈의 샤우트 창법이 요구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는 동안 지하 연습실의 익숙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만화 습작은 전혀 한 적이 없는 건가.

=창원에서는 만화에 대한 정보도 도구도 구하기 힘들었다. 다만 책의 여백만 보면 만화를 그렸다. 다른 애들은 멋있는 그림을 흉내냈지만 나는 윤승운, 김수정 선생님의 그림, 닥터 슬럼프 캐릭터를 즐겨 그렸다.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 “아이디어는 좋으나 색칠은 못한다”는 평을 도화지 뒤에 써주셨는데 아직도 콤플렉스다. 미술부장이라 학교 대항 대회에 나가기도 했는데,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미술의 정훈이만 빼고 우리 학교 대표들이 다 상을 탔습니다”라고 발표하신 일을 잊을 수 없다. 정식수업은 못 받았지만 다른 식의 수련을 했다. 여자친구에게 매일 편지를 쓰면서 일상을 전하는 게 아니라 매번 스토리와 장치를 고안해 재미있게 해주려고 골몰했다. 그걸 3년쯤 하니까 재주가 되더라. 꽤 야한 내용을 친구들의 실명과 실제 캐릭터를 끌어들여 극화한 연재만화도 그려 학교에 돌렸는데 인기가 높았다.

-실제인물을 끌어들였다면 ‘만화 vs 영화’의 원형 아닌가. 고교 졸업부터 <리모코니스트>로 <영챔프> 공모전에 당선돼 데뷔하기까지 공백기를 어떻게 보냈나.

=삼수까지 실패하고 영장이 나왔다. 김진태 작가 인터뷰에서 만화 가르치는 학원이 있다는 걸 처음 알고 서울의 만화학원에 등록했다. 6개월 과정을 한달 남기고 다시 영장이 나와 동사무소 방위가 됐다. “네 평생 공무원 될 기회는 이번뿐”이라는 아버지 말씀대로. 열심히 재미있게 지냈다. 동사무소 귀염둥이였고 동네 다방에 드나들고 사회 복지사들을 도우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만화 속 많은 이야기가 그때 경험이다.

-이른바 패러디 만화로 만화가 이력을 시작한 경위를 설명한다면.

=<씨네21>의 제의 직전에 만화잡지에 패러디 만화 아이디어를 냈다가 거절당했다. 당시 영화를 패러디하는 TV 프로그램이 난립해서 식상하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비트는 게 아니라, 아주 촌스러운 살아가는 이야기 또는 고전과 역사를, 영화를 빌려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생활의 관찰과 경험이 먼저고 그걸 담는 틀로 영화를 끌어온다. 특정 영화를 패러디하려는 의도로 출발하진 않는다. 그래서 영화사에서 개봉작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해도- 강직해서가 아니라- 응하기 힘들다. 초기에 개봉 6개월쯤 지난 신간 비디오를 주로 소재로 삼은 것도 그래서다. 영화는 사전정보를 모아두었다가 내 이야기에 대입시키고 뒤늦게 ‘확인사살’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감동받은 영화는 잘 못 그린다. <박하사탕>이 그런 예다.

-엄밀히 말해 영화 패러디라기보다 영화를 ‘핑계’로 삼은 만화로 보이기도 한다.

=가끔 내가 그리는 것이 패러디 만화인가 하고 반문도 한다. 나에 관한 기사는 패러디라는 점에, 영화를 비틀었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출 때가 많은데 그건 내 만화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설정이나 캐릭터를 따올 때도 있고 영화를 끌어들이는 정도는 매번 다르다. 사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메추리알이 캔디랑 데이트하는 내용)처럼 숨겨놓은 장치없이 제목만 갖고 갈 때가 인간이 비참할 때다. (웃음)

-<무사>의 황토색 색감, <사무라이 픽션>의 흑백 촬영과 엉터리 일본어 대사,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디지털 업그레이드 등 영화의 내러티브뿐 아니라 형식 자체를 이용한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작품들은 나도 만족한다. 영화에서 캐릭터나 내용만 비틀 수 있다는 생각은 선입견이다. 단 하나의 장치든 감독의 사연이든 갖고 가면 된다. <씨네21> 독자들을 믿고 가는 거다. 패러디라는 용어선택의 문제인 것 같다.

<사무라이 픽션>

<사무라이 픽션>

진짜 남기남 감독님 있는 것 알고 당황

-<씨네21>이라는 잡지의 속성이 ‘정훈이 만화’에 끼친 영향이나 제약이 있나.

=진보적인 신문 <한겨레>의 특성에다가 영화전문지여서 처음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의뢰를 받고 창원에서 어렵사리 잡지를 구해봤는데 첫인상이 ‘먹물잡지’ 같아서 영화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나로선 걱정이 앞섰다. 진보와 보수의 개념도 없을 때니 막연히 독재와 반독재 사이에서 뭔가 해야겠구나 생각했고, (웃음) 그래서 고른 첫 영화가 한국 근현대사를 건드린 <포레스트 검프>였다. 나름대로 매체적 특성을 잘 맞췄다고 흡족해했다. 물론 그 다음부터는 역시 내 마음대로 그리고 말았지만.

-무엇보다 <씨네21>이 끼친 영향이 있다면, ‘정훈이 만화’를 전적으로 방임하는 태도 아닐까.

=10년을 연재하면서 한번도 태클을 받은 적이 없다. 심지어 오자 난 것도 안 잡아준다. (웃음) 마감을 하도 급박하게 해서 한번은 편집장이 만화를 읽지 못하고 인쇄한 적도 있다. 다른 잡지에도 연재를 했지만 이런저런 개입이 많다. 특히 사보의 경우는 부장, 전무, 이사 결재까지 받아야 한다.

-일반적인 작업의 과정을 묘사한다면.

=친구와 대화하거나 방바닥을 뒹굴거리다 아이디어를 건진다. 메모를 하지 않는 습관 때문에 마감 닥쳐서 친구한테 전화해서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해 봐!”라고 들볶기도 하고 휴대폰에 대충 입력해둔 키워드가 무슨 뜻인지 몰라 끙끙대기도 한다. 일단 그리기 시작하면 6시간 안에 끝난다. 사전에 콘티는 전혀 안 짠다. 기승전결의 포인트도 미리 정하지 않고 그냥 한달음에 그린다. 그래서 광고 스토리보드 작업 같은 걸 하면 힘들다. 일단 스토리를 결재받고 한달 뒤에 그려야 하니까 죽을 맛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그런 식이었다. 코너 이름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정훈이 만화’가 되었고, 캐릭터도 작정하고 만든 게 아니라 연재를 하다보니 생겼다.

-정훈이 만화에는 남기남, 김꽃달, 씨네박 등 4∼명의 고정 출연자가 있다.

=가장 먼저 만든 씨네박은 방위병 시절 오버쟁이 중대장을 모델로 했다. 여성적이고 나를 닮은 성격의 남기남 캐릭터는 고등학교 친구 현식이의 45도 뒷모습에서 외모를 빌렸고 우연히 친구에게 들은 ‘남기남 시리즈’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공교롭게도 동명의 감독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했다. 게다가 ‘충무로 이단아’ 씨네박까지 있으니 오해하셨을까봐 죄송스럽다. 김꽃달은 “여자 캐릭터라고 꼭 예쁘고 섹시해야 하나. 여자도 남자랑 똑같다”라는 생각으로 그린 캐릭터다. 재수 시절 “김꽃달 학생 교무실로 오세요”라는 구내방송으로 학원을 뒤집어놓았던 이름을 빌려왔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1997년부터 <영챔프>에 연재한 <트러블 삼국지> 이야기를 하자. <고우영 삼국지>가 관우와 제갈공명을 정치적 라이벌 관계로 해석한 점이 인상적이었다면, <트러블 삼국지>는 장비를 유일하게 문제해결능력이 있는 인물로 본 것이 특이했다.

=장비는 보편적으로 가장 인기없는 <삼국지> 속 영웅이다. 하지만 알고보면 똑똑한 인물이다. 고민을 하지 않고 이것저것 잴 줄 모르는 장비는 중국이 개방할 무렵 인기가 치솟았다고 한다. <트러블 삼국지>의 장비는 에어로빅을 하고 인형을 좋아하는 등 여성형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트러블 삼국지>는 결말이 흐지부지했다. 원래 원했던 작품을 그리지 못한 건가.

=면밀한 구상없이 시작해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림체도 어울리지 않았고 매주 기발한 코미디를 충족시키면서 <삼국지>의 잘 알려진 대목과 연결하려니 통제가 안 됐다. 연재 당시에도 내부 기자만 좋아하고 인기가 없었다.

-<트러블 삼국지>의 말을 비롯해 많은 동물을 돼지처럼 그린다. 용, 바퀴벌레, 나아가 <스타워즈>의 요다까지 돼지와 비슷하게 그리는데, 특별한 애착이 있는 건지.

=그림체의 비례가 워낙 그렇지만 돼지를 좋아하긴 한다. 어릴 적 ‘갈비’라 불렸던 나는 돼지라는 귀여운 별명을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스스로 살이 찌기 시작하니까 누군가 “돼지”라고 불렀을 때 어감이 좋지는 않더라. (웃음)

-영화와 TV를 패러디하는 와중에 간간이 시사만화의 색깔을 내비쳤다.

=사실 그리는 입장에서 제일 싫은 부문이 시사만화다. 아이디어가 궁할 때, 누구나 이해하는 당면한 시사적 내용을 차용하는 것 같아서 피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시사만화가 인상이 강한지 어디 가면 “<한겨레21> 시사만화가 정훈이씨”라고 소개받기도 한다. 모든 만평가들이 고민하듯 시사만화는 시간이 흐르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받기 힘들다는 점이 슬픔이다. 나의 시사만화에 대해서는 “네가 무슨 혁명가냐”고 말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시사만화 그릴 때가 제일 좋다는 사람도 있다. 내 결론은 시사도 그저 하나의 재료라는 것이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자기만의 한갓진 세계에서 형식적인 유희를 즐기는 귀차니스트다. 그 점을 고려할 때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보여준 가히 ‘열정’이라 부를 만한 지지는 흥미롭다.

=그것은 스스로와 맺은 약속 같은 것이었다. 홈페이지 만든다고 한창 서핑하고 다닐 무렵 정치인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노무현 후보의 사이트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연구하는 모습이 있었고 제대로 된 커뮤니티가 있었다. 업적과 ‘걸어온 길’을 나열한 천편일률적인 정치인 사이트와 달랐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정치를 실현하려 하고 있었다. 보좌관에게 “정치인 홍보만화 청탁을 수락한 적이 없지만 당신이 선거에 나온다면 봉사하겠다”고 메일을 썼다. 답장도 오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다짐 같은 것이었다. 김대중 정권 말기에 국정홍보지 일을 하면서 누수현상과 차기 대통령 유력자 앞에 줄서기하는 모습에 어떤 절망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 믿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이라는 수평적 공간에서 국민들의 자발적 힘을 발휘해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과정이 드라마틱했다. 노 후보는 내게 세상이 어떻다는 의제를 정리해주는 존재고 정치인으로서 드물게 인간다운 화법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나서지 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실제로 선거 때 활동하고 나서며 진행하던 일이 높은 사람 선에서 좌초되는 경우도 있었다. 노무현은 나로선 평생 처음 열광을 보낸 스타다. 지금은 큰 관심이 없다. 알아서 잘 일하고 있으니까 잊어버리고 산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라는 세상에 대한 정치적인 원칙은 언제 형성됐나.

=1991, 92년 재수, 삼수할 때 하숙집에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선거 때 출신지역으로 갈리는 걸 보았고 광주 민주화운동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세상은 내가 아는 세상과 다른 곳이었다. 고대사만 좋아했는데 이후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근현대사는 현재와 연결된다. 그 속에서 우리 동네 출마 후보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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