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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브리스톨 스토리
김도훈 2005-04-29

히드로 공항에는 정말 사람이 많았다. 머무를 곳이 런던이었다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브리스톨로 가야만 했고,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 퀴퀴한 터미널에 도착했다. 데리러 온 사람은 없었다. 1.25파운드(2500원)짜리 콜라를 사서 남는 동전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너희들의 회사에서 일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남자다. 어떤 장소로 가면 되는지 알려줄 순 없겠니?” “쏼라쏼라쏼라.” 키 190cm가 넘는 밥 말리가 터미널로 왔다. “안녕. 나는 너를 보게 되어 매우 반갑다. 연합 왕국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날씨가 상당히 좋구나.” “쏼라쏼라쏼라.”

서부 영국의 영어는 암호 같았고 일은 지옥 같았다. 나는 짧은 영어로 산수와 영어를 가르쳤고, 애들은 “Wanker”니 “Tosser”니 하는 단어들을 천사처럼 웃으면서 건넸다. 그 경쾌한 단어들이 ‘손으로 대단히 부끄러운 일을 하는 남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서너주가 지나서였다. 손목에 자해자국이 가득했던 로이는 6살이 되던 해부터 삼촌에게 강간을 당해왔던 아이이고, 내 목에 몇번이나 커터칼을 들이댔던 리키는 부모가 헤로인 중독자였으며, 화가 나면 방을 쓰레기더미로 만들고야 겨우 진정했던 아론은 플리머스에서 몸을 파는 엄마를 죽도록 보고 싶어했다. 점점 나는 그들을 구슬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를 죽여버리겠다 호언장담하던 대런을 달래는 방법은, A4용지에 로봇을 그려주는 것이었다. 몇번인가 이 자식은 나에게 “Thanks”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You’re a fucking wanker!”(너는 손으로 대단히 부끄러운 일을 하는 남성이다!)라는 첫인사가 돌아오긴 했지만, 뭐 그만하면 견딜 만했다.

계절이 몇번 바뀌고, 나는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사장은 돌아와서 계속 일해달라며 영국인 선생들과 같은 연봉을 주겠노라고 했다. “물론이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금방 돌아올 것이다”라고 대답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파운드화와 미래를 열심히 저울질하고 있었다. 젊을 때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친구 데보라는 돌아오면 자신의 3층집에서 지내라며 신신당부했다. 대마를 팔아 용돈을 벌던 룸메이트 톰은 가장 아끼는 개러지 CD를 선물로 주었다.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좋았다. 마지막 날엔 아이들을 모두 만났다. “나는 금방 돌아올 것이다. 한국에서 갖가지 선물을 상당히 사서 올 것이다.” 대런은 “꺼져라. 손으로 대단히 부끄러운 일을 하는 남성아”라고 했고, 로이와 아론은 나를 안고 울었고, 리키는 삐쳐서 나를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영국행을 기다리다가 <씨네21>에 입사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로이, 대런과 리키는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고, 손재주가 좋던 아론은 기술학교로 옮겨갔다고 한다. 나의 “돌아올 것이다”라는 인사는 거짓말이 되었고,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악마 같던 놈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캠코더를 사기로 결심했던 것은 지난 겨울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캠코더에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면, 그건 바로 그놈들이어야만 했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걸 누군가는 남겨두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첫 휴가를 브리스톨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고백건대 입사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물론 캠코더 값을 벌기 위해 입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