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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의 애버뉴C] 24th street / 나는 무성영화가 좋다.
글·사진 백은하( <매거진t> 편집장) 2005-04-29

그들은 온몸으로 울었다

무성영화 시대, 세 명의 스타 -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해롤드 로이드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에서 보면 미국소년 매튜와 파리소년 테오, 이 두 씨네마키드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 중에 누가 더 위대하냐”에 대한 문제였다. 물론 그 두 거장의 위대함을 저울질 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모한 시도다. 하지만 누구 하나를 꼭 골라야 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버스터 키튼 쪽으로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건 키튼이 생전에 채플린보다 덜한 명성을 얻었음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다. (아, 물론 <선셋대로>에서 늙고 초라한 그가 잠시 등장 했을 때의 가슴 무너지는 느낌이란!) 그보다는 ‘무성영화’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키튼의 방식이 채플린의 그것 보다 훨씬 더 무성영화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채플린에게 얼굴의 드라마가 있었다면, 키튼에게는 몸의 드라마가 있었다. 채플린이 눈으로 눈물을 흘릴 때, 키튼은 온몸으로 울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해 말 링컨센터의 월터 리드극장에서는 <셜록 쥬니어>와 <제너럴>을 상영하는 ‘버스터 키튼 위크엔드’가 열렸다. 이 상영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스크린 앞에서 오케스트라가 실제로 음악을 연주한다는 점이었다. 그 생음악이 근육의 작은 움직임이나 손짓 하나 하나를 따라 갈 때의 감동은, 이미 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곳에서는 종종 이렇게 흑백의 무성영화에게 붉은 혈색을 돌게 만드는 흥미로운 이벤트를 열곤 하는데, 지난 주 필름포럼에서 만난 한 무성영화배우 역시 거대한 오케스트라까지는 아니었지만, 경쾌한 피아노 솔로에 맞추어 몇 십 년 만의 나들이에 한창이었다.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에 비해 국내 관객들에게 덜 알려진 무성영화계의 3번째 스타는 바로 동그란 안경테의 해롤드 로이드(Harold Lloyd)다. 채플린이 슬픈 어릿광대 같았고, 버스터 키튼이 아크로바틱 묘기를 선보이는 무표정의 소영웅이었다면, 익살스러운 표정과 발랄한 몸동작의 해롤드 로이드는 평범한 미국인의 초상이었다.

지난 4월 20일은 해롤드 로이드의 112번째 생일이었는데, 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필름포럼에서는 손녀인 수잔 로이드가 직접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스크린 속 연인에서 자신의 할아버지와 실제의 동반자가 된 할머니의 이야기를 즐겁게 전하던 그녀는, 우연히도 내 뒷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백 번도 천 번도 더 보았을 법한 할아버지의 영화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즐기고 있었다. 매순간 진심으로 웃고, 매순간 탄식을 내뱉으면서 말이다. 아, 말장난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위대한 슬랩스틱의 영속함이여.

사실 해롤드 로이드의 영화를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한 남자가 커다란 시계바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유명한 스틸컷은 한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거론 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작 <안전한 결말>(Safety Last)에서 그가 시계바늘에 매달리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사랑하는 약혼녀를 고향에 두고 도시로 올라온 로이드씨는 여전히 백화점 말단 판매원사원이지만 쌈짓돈을 모아 사랑하는 여자에게 근사한 선물을 보낸다. 그러다 보니 약혼녀는 그가 성공한 줄로만 알고 도시로 깜짝 등장을 하는데, 결국 그는 백화점 사장에게 대낮에 건물을 기어 오르는 쇼를 해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조건으로 결혼식자금을 모으려 한다는 내용이다. 별다른 안전 장치도 없이 건물 벽을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면 ‘안전한 결말’ 이라는 제목이 우리를 안심시킨다 해도, 순간순간 심장이 철렁철렁 내려 앉는 느낌을 막을 수가 없다.

문자의 강에 빠진 행동 부재의 시대에 무모한 몸의 언어가 그립다

나는 무성영화가 좋다. 그 영화들은 녹음기술의 저개발이 낳은 어쩔 수 없는 산물이나, ‘토키영화’로 건너오기 위한 중간단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대사와 이야기의 포장술에 기대지 않은 더 없이 정교하고 영화다운 영화라고 믿는다. 게다가 요즘처럼 시나리오의 질이 척박해져만 가고 가슴을 치는 대사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무성영화에 대한 향수가 짙어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자의 강에 빠져, 언어의 산에 둘러싸여, 실질적인 행동의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사실 백장의 달콤한 이메일보다, 장시간의 전화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대낮의 빌딩을 기어오르는 그런 무모한 몸의 언어가 그리운 법이다. 뇌를 거치지 않는 즉흥적인, 동물적이라 너무 솔직하고 짜릿짜릿한 그 육체의 향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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