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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10년 사건과 실화 [3]
박은영 2005-05-03

Episode 6. “우리 형님으로 포장을 해달라니까”

1999년 7월, 모 감독 형제 찾아와 협박

“우리 형님으로 포장을 해달라니까요!” 그들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온 것은 오전 11시경, 찾아오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몇 시간 뒤 정말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그들이 화가 난 건 한 배우의 인터뷰 기사 때문이었다. 어떤 영화의 촬영장에서 만난 그는 <씨네21> 기자에게 자신이 출연한 다른 영화를 가리켜 “내가 출연했다고 무조건 좋은 영화라고 하진 않는다. 촬영할 때부터 실망스러웠고, 작품에 애정도 없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 해당 영화를 연출한 감독과 그 동생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문제는 이 배우가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한 데서 시작됐다. 졸지에 없는 말을 지어낸 꼴이 되어버린 <씨네21>에 정정 보도를 의뢰하러온 이들은, 절충안으로 감독의 포장, 즉 표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최보은 취재팀장과 김영진 기자가 떴다. 살벌한 분위기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고, 마침 다른 약속이 있던 김영진 기자는 서너시쯤 자리를 떴다. 몇 시간 뒤, 최보은 팀장에게서 회사 앞 호프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설마 하며 합류한 자리엔 그들 형제가 여전히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은 역전돼 있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오야붕으로 모셨을 겁니다.” 그들은 최보은 팀장을 누님 대하듯 하고 있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글쎄, 잘 기억나지는 않네요. 찌질한 얘기 그만하고, 내 남편이나 손봐달라고 했던가? 내 안의 조폭적 기질을 본 거죠. 우아한 직업 종사자답지 않은. 솔직하니 멋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역전되더라고요.” 최보은 팀장의 회상이다. 파란만장했던 이 협상은 감독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마감됐다. 다음 영화를 LA에서 찍는다며 촬영장에 취재진을 부르겠다던 그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Tip03. 오자와 인쇄사고의 날들

부산영화제 프리뷰 특집 제목이 Cooming Soon으로, 그것도 표지에 가장 큰 글씨로….

<오! 브라더스> 개봉 당시 이범수 스타덤에 이름이 김범수로(이범수씨,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프리뷰 박스에 영화 제목이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로(홍상수 감독님, 죄송합니다).

재일한인 감독 특집에, 이상일 대신 안노 히데야키의 얼굴이 일러스트로 대문짝만하게 나가다(이상일 감독님, 죄송합니다. 안노상, 당신께도 죄송합니다).

해외리포트 외신기자 클럽에서 데릭 엘리의 글에 다른 필자(아드리앙 공보, 달시 파켓)의 얼굴이 두번이나 실림(미스터 엘리, 미안합니다. 당신이 농담 삼아 제기한 음모론에 저희 모두 뜨끔했습니다).

그 밖에 오탈자 및 인쇄 사고 다수(독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Episode 7. “그땐 기자 김봉두도 있었지”

1997년 11월, 영화 담당 기자들의 거센 항의

1997년 11월, 한 영화사 홍보 담당 간부가 낮술을 걸친 채 <씨네21>을 찾아왔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한 기자에게 하소연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는 회사 지출 결재도 안 난 상태에서 촌지를 달라는 어떤 기자의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일단 개인 돈으로 지출하려고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고, 출금한 돈을 퀵서비스로 보냈다고 했다. 당시 꼿꼿한 글쓰기로 ‘지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조종국 기자에게 곧바로 취재 오더가 떨어졌다. 마침 한 영화사에서 우연히 촌지 명세서라는 것을 보기도 했던 그는 일부 영화기자들이 공공연히 촌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토대로, ‘다시 불거진 촌지 수수설’이라는 제목의 가십성 리포트를 내보냈다.

이 기사의 파장은 컸다. 영화 담당 기자들로부터 거센 항의가 밀려들었다. 관련자들의 실명을 밝히지 않고 구체적인 사례를 적시하지 않아서, 하나의 거대한 경향처럼 비쳤고, 그 결과 피해를 봤다는 결백한 기자들의 성토였다. 중간 데스킹 과정에서 추가된 “<한겨레>나 <씨네21>처럼 회사나 조직 차원에서 안 받을 것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경우도 있다”는 문구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촌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거나 자정하자는 취지에는 공감들 했겠지만, 우리만 독야청청하다는 듯한 논조에는 문제가 있었던 거죠.” 기사가 나간 뒤에 한 기자에게 시사실 골방으로 끌려가는 등의 봉변을 당하기도 했던 조종국 기자의 회상이다. 조선희 편집장은 에디토리얼 ‘촌지유감’에서 피해를 본 기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지만, 이 기사의 싸늘한 잔영은 오래 갔다. 일부 간부급 기자들의 촌지 수수 사건, 일명 ‘영화 게이트’가 터진 건 그로부터 4년 뒤의 일이었다.

Tip04. 10년 장수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최장수 코너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37호∼현재)

최장수 필자 - 이철민(인터넷 탐험에서 네트21로, 15호∼429호)(만화 vs 영화의 정훈이는 창간 초기 부정기적으로 만화를 싣다가, 1996년 초부터 지금까지 연재하고 있어 열외로 놓습니다)

최단명 코너 - 비디오 제작교실(15∼20호), 창간호부터 14호까지의 일부 코너들, 오피니온, SFX 다시 보기, CD-ROM 걸작

최다 필자 동원 코너 - 내 인생의 영화(184호~? 확인요), 추억 속의 극장(21∼70호, 총 50명)

Episode 8. “남동철 기자는 자폭하라!”

1999년 7월, 영구아트무비 직원들의 항의시위

“남동철도 기자냐?” “남동철은 자폭하라!” 1999년 7월 어느 아침, <한겨레> 사옥 앞마당에 50여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시위대 속에 간간이 보이는 피켓의 문구에서 이들의 불만과 주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용가리> 개봉을 앞둔 영구아트무비 직원들로, 세간에 알려진 <용가리> 수출액에 의문을 제기한 남동철 기자의 보도에 반발해, 항의의 뜻을 전하러 온 길이었다. 상황을 짐작한 <씨네21> 기자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위대를 지나쳐 사무실로 들어왔다.

<용가리>는 1998년 칸영화제 마켓에서 9개국 272만달러의 수출 계약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가 거액에 해외로 수출되는 일은 없었던 만큼 언론은 이를 앞다퉈 보도했고, 이후 1년 동안 심형래 감독은 정부의 공익광고에 출연하는 등 시대의 영웅으로 추어올려졌다.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니까 못하는 겁니다”라는 유행어와 ‘신지식인’이라는 수식어도 그때 나왔다. 신문과 TV에 연일 보도되는 <용가리> 수출 관련 내용에 실수출액이 드러나지 않는 점을 이상하게 여긴 남동철 기자는 같은 마켓에 참여했던 영화인들과 영구아트무비를 취재하면서, 애초 계약이 구속력이 없는 딜 메모였고, 그 결과 일부 국가와는 최종 계약이 성사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심형래 감독의 성과를 무시하려던 게 아니라 언론과 정부의 냄비 근성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사를 썼던 거죠.” 항의 방문한 직원들은 반론권을 얻고 철수했지만, 그들의 풀 죽은 뒷모습은 남동철 기자의 마음에 아직도 무겁게 남아 있다.

Episode 9. “여기가 어딘줄 알고!”

2000년 6월, 해병대 전우회 <한겨레> 5층 공격

“쨍그랑!” 5층 출판사무국 유리창으로 벽돌이 날아들었다. 비상구와 연결된 씨네21부는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이영진 기자는 책장을 옮겨 비상구 문을 막기 시작했다.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비상구 저편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중년 남자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책장이 흔들렸고, 문틈으로 쇠파이프와 벽돌이 드나들었다. 순식간에 네댓명의 해병 전우회원들이 밀고 들어왔고, 닥치는 대로 집기를 부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남아 있던 기자들과 함께 빠져나가려던 이영진 기자는 멈칫했다. 안정숙 편집장이 도망갈 생각도 않고 전우회원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순간 이영진 기자는 불량배 앞에서 애인을 보호하는 품새로 안정숙 편집장을 막아섰다. “솔직히 당황스러웠습니다. 모시고 대피하기까지 그 몇초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2000년 6월27일, 고엽제 전우회 2천여명이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날이었다. <한겨레>의 베트남 참전군 양민 학살 보도로 명예가 실추됐다며 격노한 그들은 경비초소를 부수고, 승용차에 불을 지르고, 신문사 5층과 8층을 습격했다. 그중 <씨네21>의 피해가 가장 컸다. 데스크톱, 노트북, 프린터 등이 부서지고 편집장을 엄호하던 이영진 기자도 손에 부상을 입었다. 우리의 보도로 인한 피해는 아니었지만, 창간 이래 가장 강렬한 물리적 충격이자 공포였다. 이쯤에서 의문 하나. 안정숙 편집장은 왜 피신하지 않은 걸까? “내가 그랬다고요? 글쎄, 기억이 안 나는데요. 내 자리에서는 그 사람들이 들어오는 게 안 보였거든요. 도망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였을 텐데….”

Episode 10. “필자님, 오, 우리 필자님”

2001년 12월, 주간지 최초의 권말 특집

2001년 12월, 허문영 편집장은 일주일째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이 원고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줄여달라고 부탁할까? 아냐, 그건 너무 가혹해. 부록으로 내볼까? 아냐, 그건 제작비 때문에 곤란할 거야. 몇회로 연재를 해볼까? 아냐, 그건 임팩트가 없어. 아… 이를 어쩐다?’ 그를 고민하게 만든 원고는 장장 400매 분량의 <취화선> 촬영 동행기였다. 늘 하고픈 말이 차고 넘치는 열정적인 평론가 정성일씨가 촬영현장을 여러 날 따라붙어 취재하고 작성한 원고인 만큼 양이 묵직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100매로 청탁한 원고가 4배나 불어서 날아들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전재의 욕심을 부려볼 만한 좋은 글이었다. 유레카! 허문영 편집장은 ‘권말 특집’이라는 요상한 코너를 급조해, 원고를 전재하기에 이르렀다. “음… 주간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를 거쳐간 필자들의 개성도 남달랐다. 시사주간지 편집장과 유명 작가라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한겨레>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로 일선에서 뛰어다니던 김훈씨는 원고지에 육필로 쓴 글을 들고 오거나 팩스로 보내오곤 했다. 흥미로운 건 주문한 원고 매수를 마지막 줄, 심지어 마지막 칸까지 정확히 맞춰 보낸다는 사실. “한번은 하도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딱 맞게 보내느냐고. 그랬더니 원고량을 생각하고 쓰다 보면, 정확히 끝내야 할 지점에서 끝내진다고 하더군요.” 또 한 사람의 잊지 못할 필자는 두 차례의 긴 연재 기간 동안 특유의 직선적인 글로 논란을 몰고 다녔던 김규항씨다. 그가 페미니즘 진영을 비롯, 특정 인물과 직업군에 신랄한 공격을 가하고 나면, 편집팀은 반론의 지면을 넉넉히 비워둬야 했다.

Tip05. 검열 철폐부터 아름다운 영화인까지, 캠페인의 역사

특별기획, 영화 검열 철폐 캠페인(48∼60호)

연속특별기획, 영화 심의제도 개혁 캠페인(74∼82호)

창간 3주년 기념 캠페인, 한국영화를 위한 10가지 제언(150∼159호)

시네마테크 설립을 위한 제언(271호)

긴급 캠페인, 영화인 파병 반대(462∼466호)

아름다운 영화인, 나눔을 실천하자(484호∼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