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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연기파, <모래와 안개의 집>의 벤 킹슬리
김혜리 2005-05-04

영화산업이 아무리 융성한들 늙고 유능한 배우의 눈에 영화판은 언제나 발뻗을 데 없이 좁아터진 골방이다. 이 달인들은, 고작해야 “영화에 과분한 연기”니 “낭비된 배우”니 하는 소리를 찬사랍시고 돌려주는 영화를 줄줄이 찍다가, 이따금 그들의 재능을 예우하는 영화를 만나 숨통을 틔운다. 물론 그때는 구경꾼도 정신이 번쩍 난다. 늘어져라 낮잠만 자던 우두머리 사자가 포효하는 찰나를 운 좋게 목격하는 짜릿함에 비할까. 아버지 역으로 출연한 TV시리즈 <안네 프랑크>에서 로버트 헬름 감독으로부터 “마치 스트라디바리우스(바이올린 명기)를 얻은 기분이었다”는 찬사를 끌어낸 바 있는 노장 벤 킹슬리(62)의 필모그래피도 꽤나 들쭉날쭉하다. 하지만 최근 개봉한 <모래와 안개의 집>은, ‘간디’의 이미지를 박살낸 완벽한 런던 갱 연기를 과시한 <섹시 비스트>(2000) 이후 그가 3년 만에 내지른 사자후다.

이란 왕정기에 장교로 영화(榮華)를 누리다 이슬람 혁명에 떠밀려 미국 땅으로 망명한 <모래와 안개의 집>의 마수드 베라니 대령은 자긍심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낮에는 공사장에서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당을 버는 그는, 일과가 끝나면 고급 정장으로 갈아입고 아내에게 돌아간다. 베라니는 그처럼 현실의 자신과 마음속 자화상 사이에 깊은 금이 간 인간이다. 하지만 벤 킹슬리가 연기하는 베라니는 그럴수록 자세를 더욱 곧추세운다. 뒤통수와 발꿈치가 일직선이 될 때까지 등뼈를 꼿꼿이 편다.

베라니는 영웅이 아니다. 독선적인 가부장이며 편견을 골수에 새긴 불완전한 인간이다. 벤 킹슬리는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킹슬리는 그렇게 연기했고 덕분에 우리는 이 어리석은 사내가 누군가에게- 설령 그것이 신이라 해도- 무릎 꿇고 애원할 때 고개를 돌리고 싶어진다. 아마 킹슬리는 이 영화에서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래와 안개의 집>의 베라니는 애당초 원작소설의 작가가 킹슬리를 모델 삼아 창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부류의 배우들은 다르게 일하는 법 자체를 알지 못한다. 군복을 보관한 비닐로 자기를 질식시키는 장면에서, 벤 킹슬리는 실제로 호흡 곤란 상태 속으로 9번이나 자신을 밀어넣었고 소품팀은 그때마다 면도날로 그의 얼굴을 동여맨 비닐을 찢어내야 했다.

킹슬리가 베라니 역을 선택한 이유는 여느 때와 특별히 다르지 않다. 베라니가 고전적 인물이고 원형적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녀(베라니와 집을 놓고 분쟁을 벌이는 여인)와 베라니가 2500년 전에 만났대도 얘기는 같았을 거다”라고 킹슬리는 장담한다. 원형적 인물에 대한 애착은 스물세살에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에 입단해 15년간 형성된 킹슬리의 뿌리 깊은 취향. 그는 고통과 패배의 와중에 무언가를 호소하는 처절한 아버지 베라니를 리어왕에 빗댄다. <섹시 비스트>의 망나니 갱 돈 로간에게조차 그는 <오델로>의 이아고를 보았다. 그처럼 벤 킹슬리는 근본적이고 오래 지속되는 것들에 관심이 치우친 배우다. 레닌, 모세, 간디처럼 거의 화석이 된 인물을 연기하고, 쉰들러의 비서, 셜록 홈스의 조수 와트슨처럼 변치 않는 미더운 2인자 역에 자주 부름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의 외모조차 ‘인간’의 추상에 가깝다. 173cm의 아담한 키와 말끔히 민 머리, 좀체 깜박이지 않는 눈, 극동을 빼면 거의 모든 국적을 연기할 수 있는 복잡한 혈통의 외모는 온갖 변형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본형으로 보인다.

부지런한 킹슬리의 많은 차기작 가운데 기대를 부추기는 것은 소매치기 두목 페긴으로 분하는 새로운 <올리버 트위스트>. 하지만 이번이 아니라도 벤 킹슬리 경은 동료 이안 매켈런 경이나 앤서니 홉킨스 경이 그렇듯, 언제든 적당한 영화를 만나고 적당한 기분만 들면, 수저를 놀리듯 심상한 표정으로, 보통의 젊은 배우라면 언론이 호들갑을 떨 만한 연기를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킹슬리는 이미 아무도 정색하고 연기를 평가하려 들지 않는, 이스터 섬의 석상과 같은 오래된 기념물이다. 이스터의 석상. 그러고보니 닮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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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R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