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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을 노리고 있다!
2001-02-06

음모이론 소재로 한 스릴러 <컨스피러시>

컨스피러시

Conspiracy Theory 1997년,

감독 리처드 도너 출연 멜 깁슨, 줄리아 로버츠

1월26일(금) 밤 10시55분

1980년 12월8일, 어디로부턴가 “해치워, 해치우란 말이야!”라는 소리를 들은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존 레넌을 쏘았고 그 자리에 앉아서 J. 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후에 채프먼은 사람들로 하여금 샐린저의 책을 읽게 하려고 그 일을 저질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사람들에게 레넌의 피살은 조직적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식의, 상상력 풍부한 어떤 시나리오를 제공해주었다. 이에 따르면, 채프먼은 정보기관으로부터 암살요원으로 길러졌는데, 그때 샐린저의 책은 마인드 컨트롤을 위한 재료로 쓰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가설은 아직 그 신빙성이 증명되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그 진위야 어쨌든 이 가설이 적어도 한편의 영화, 즉 리처드 도너의 <컨스피러시>에 기본적인 착상을 제공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컨스피러시>에는 시민들을 살인자로 만드는 정보기관의 프로그램, 그것의 흔적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이 숨겨져 있다. 영화 속에 구축된 음모의 심연에는 그런 모티브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컨스피러시>는 그것들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가지고 전개 경로를 만드는 스릴러영화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실체가 완전히 가려져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베트남전은 하워드 휴스와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의 내기 때문에 발발했다거나, 올리버 스톤은 조지 부시의 고용인이라는 등의 정말이지 ‘창의적인’ 음모론을 쉴새없이 토해내는 뉴욕의 택시운전사 제리(멜 깁슨)는 정작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음모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하고 있는 게 없는 인물이다. 제리는 자기가 조사한 음모이론들을 가지고 법무부 변호사 앨리스(줄리아 로버츠)를 종종 찾아가지만 그것들은 전혀 그녀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제리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납치당해 고문을 받는다. 이 끔찍한 사건 이후 제리와 앨리스, 그리고 음모세력 사이의 숨겨졌던 관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말 그대로 음모의 희생자인 <컨스피러시>의 주인공 제리는 마치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를 연상케 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건 피상적인 측면에서 둘 다 뉴욕을 배회하는 택시운전사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더 나아가 둘 다 망집에 시달리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치유가 필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러닝타임이 지나갈수록 이 둘은 거의 정반대쪽을 향해 달려간다. 트래비스가 점점 내면의 광기를 내파하는 쪽으로 치닫는다면 처음엔 너무 분열기가 심해 전혀 동화(同化)를 허용하지 않았던 제리는 점점 이성을 찾아간다. 제리가 이처럼 차츰 관객의 이해를 얻어가는 것은 사실 영화의 진행 방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컨스피러시>는 무언가 세상을 움직이는 배후의 음모에 대해 폭로할 기세로 시작하지만 얼마 안 가 장르의 규칙에 순순히 복종하면서 ‘안정된 길’(?)로 접어든다. 게다가 스토리가 나아갈 그 길이라는 것도 계속되는 추적과 탈출로만 그려져 있어 상당히 단조로운 편이다. 그렇다고 스릴러영화로서 <컨스피러시>가 영 볼품없는 상업영화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음모이론>(Conspiracy Theory)이라는 원제가 주는 적지 않은 무게감만을 보고 괜히 기대치를 높게 잡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