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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화 기행: 타이 [2] -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촬영현장
이영진 2005-05-10

세상에서 가장 괴상한 촬영현장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계의 욕망> 촬영 현장을 가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좀처럼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따로 지시하는 것도 별로 없다. 디지털캠코더 이동시에 곁에 있는 1∼2명의 스탭들을 손짓 아니면 눈짓으로 부르는 게 전부다. 감독이긴 하지만 웬일인지 그는 ‘액션’을 부르지도 않고, ‘컷’을 외치지도 않는다. 35mm 카메라는 모니터 앞에 다리 뻗고 앉은 한 여자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남녀 배우 두 사람도 그녀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 반면, 위라세타쿤은 염탐이라도 하듯 캠코더를 들고 수풀 사이를 이리저리 유영하고 있다. 쓱 돌아보면 누구나 쉽사리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그는 혼자서 유령놀이라도 하듯 비밀촬영이라도 하듯 자신을 숨기느라 애쓰며 35mm 구역을 맴돈다. 머리에 쓴 국방색 얼룩 모자는 어쩌면 은신을 위한 보호장구일지도.

‘액션’도 ‘컷’도 없는 조용한 현장

지난 1월21일이었다. 여태껏 본 적 없는 괴상한 촬영현장을 목격한 것은. 방콕에서 차로 3시간 거리인 껭까잔에 도착했지만, 연락을 주고받던 현장 프로듀서와의 연락두절로 인해 1시간을 헤매다 겨우 촌부들의 도움으로 정글로 들어선 촬영팀을 찾을 수 있었다. 뿌리 모를 흉측한 나뭇가지들이 타국의 도시인들에게 경배를 요구하는 좁고 험한 숲길을 따라 들어가기를 10여분. 우기인 여름엔 물이 넘치는 계곡이었을 법한 곳에, 많아야 25명이 될까 싶은 <세계의 욕망> 제작진이 모여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3인3색 프로그램인 <세계의 욕망>은 이제 막 3회차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난 주류엔 전혀 관심없다”는 위라세타쿤의 취향 때문인가. 대부분 인디영화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이 스탭의 주축이다. 두 번째 장편영화 <친애하는 당신>(2002)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됐으며, <카이에 뒤 시네마>를 비롯한 프랑스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주목받았고, 지난해 4번째 장편영화 <열대병>으로 경쟁부문에 진출해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위라세타쿤은 타이영화의 신성이다.

3중 투사의 틀 안에서 즉흥적으로

한국말이 서툰 현지 코디네이터 탓을 하며 뒤로 물러나 있을 순 없는 일. 이미지라도 남겨 기억 재생시 긴요하게 써먹을 요량으로 디카를 들고 한동안 설쳤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왜 스탭들이 제지하지 않는가 궁금해졌다. 아무리 촬영장을 수십 차례 다녔기로소니 본능적으로 슛이 들어가면 물러서고 비켜섰던 것은 아닐 테고. 생각해보니 배우를 가로막고 서서 위라세타쿤에게 디카를 들이대기까지 했는데도 그는 비켜달라는 손짓조차 없었다. 도대체 왜,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던 것일까. 난동을 부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방인의 행동을. 순간, 멈칫해졌고 뒤로 물러나는데 한국에서 미리 한 차례 인터뷰를 하고 온 인디컴 조재홍 감독이 힌트를 준다. “우리 얼굴 영화에 나올지도 몰라요.”

촬영현장을 지켜보는 취재진도 피사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없이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고 싶다”는 위라세타쿤은 “<열대병>을 찍다가 갑자기 숲속의 원숭이가 사라졌다. 언제 다시 올까 기다리다가 촬영을 마친 뒤에도 보지 못했다. 그 순간 숲에서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번 영화에선 숲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섞일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이번 영화의 시작을 설명한다. 이야기야 옛날 타이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지만, 형식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닌 듯하다. 먼저 <하룻밤의 남편>이라는 영화로 데뷔한 평론가 출신 팜피카 토위라가 35mm 카메라로 밀림으로 도망쳐 사랑을 나누는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프레임 안에 넣는다. 위라세타쿤의 파나소닉 캠코더는 그 영화를 찍고 있는 촬영현장을 따라잡는다. 그런 모습을 스탭이 또 다른 비디오카메라로 잡는다. 거칠게 말하면 3중 투사.

그러나 중요한 건 이들 시점이 동등하고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위라세타쿤은 “팜피카가 찍는 내용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놓아준다”라고 말한다. 또 한대의 카메라 또한 “나중에 자료로 쓰기 위한 것일 뿐 그것이 숲의 시점을 맡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덧붙인다. 팜피카 또한 “셀프 프로덕션 스타일인 아핏차퐁의 생각대로 편집이 이뤄지겠지만, 현장에서 나와 아핏차퐁과 나누는 이야기는 시시껄렁한 농담이 전부다”라고 답한다. 여기에 <열대병>처럼 서로 다른 낮과 밤의 세계가 따로 펼쳐진다고 생각해보라. 대단히 복잡한 방정식이 완성된다. 전주영화제 기자회견 때 그는 “밤에는 춤추고 노래하는 신비한 요정이 등장한다”고 말한 적 있다. 위라세타쿤은 항상 들려주는 정답처럼 미지수를 구하기 위해 뜯어 맞추지 말라고 충고한다.

“편집이 끝나기 전까지 어떤 영화가 나올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는 그는 달디단 대나무 통밥을 한입 베어물고, 다음 장면 촬영을 위해 더 깊은 숲속으로 한 걸음 들어간다. 불쑥 끼어든 이방인조차 즉흥성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이 기묘한 현장의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글이 보여질 때쯤이면 전주영화제 개막작인 3인3색이 공개됐을 것이다. 기묘한 분위기가 어떻게 영상으로 옮겨졌는지 또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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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이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