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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 누>를 말하다 [2]
사진 손홍주(사진팀 선임기자) 정리 이영진 2005-05-17

원규는 영웅인가 반영웅인가

김봉석 | 참형 묘사에 있어 그렇게 잔인하게 표현했어야 했나 그런 지적들도 있는데.

김대승 | 원한에 의한 연쇄살인이고, 범인의 시점으로 보여지는 장면들이다. 칼로 훅 찔러 죽일 순 없는 거다. 천천히 죽는 과정을 지켜보게 하고 싶었다.

김봉석 | 과거 강 객주의 사지가 절단되는 장면은 어땠나.

김대승 | 그 장면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원규의 기억들이 완전히 깨지는 장면이다. 초반부에 원규는 인권에게 화두를 던지며 소작농들에 대한 자신의 아버지의 품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미화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강 객주가 처형당하는 순간을 그렇게 묘사했던 것은 관객에게 ‘재밌습니까’ 하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기억을 품고 있었던 원규에게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다.

김봉석 | 그 장면의 묘사가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텔미썸딩>이나 <H>에서 보여지듯이 왜 한국영화에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들은 항상 고어에 집착하는가, 이런 궁금증이 있어서다.

김대승 | 과한 것 아닌가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사실 맘이 편치 않긴 하다. <번지점프를 하다>가 개봉하고 나서 한 동성애자가 메일을 보냈더라. 사회적 편견과 냉대가 싫은데 왜 그런 영화를 만드냐고. 내 입장에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오해가 발생하더라. 이번 영화도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 볼거리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을까봐 걱정된다.

김봉석 | <번지점프를 하다>는 잘 만든 영화였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운명까지 끌어들인 극단적인 상황 아래서 벌어지는 가혹한 러브스토리인데 너무 소프트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었다.

김대승 | 여기저기서 영화 같이 하자고 소매 붙잡는 감독이라면 모를까, 신인감독이라면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혈의 누>의 원규가 영웅이냐 반영웅이냐 하는 문제도 그렇다. 이 영화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원규가 영웅이라고 생각해서 제작비를 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하긴 죽어도 싫었고 그래서 원규를 그런 인물로 그렸지만, 사실 다른 압박도 적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 원규의 자기 합리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자를 수밖에 없었다. 제작비가 50억원이 넘는 프로젝트라는 점에 대한 스스로의 부담도 있었고.

김봉석 | <번지점프를 하다>와 <혈의 누>, 두 작품 모두 인물들이 과거에 깊숙이 얽매여 있다. 플래시백을 활용한 이유도 그런 것 아닌가.

김대승 |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태희가 죽는 장면은 보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선생님이 된 인우와 학생 현빈의 이야기가 진행되다 갑자기 밝혀진다. 관객의 궁금증이 커졌을 때 앞에서 생략했던 장면들을 끼워넣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그게 극중 감정과 맞물리면 좋겠다 싶었다. 생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감정이나 리듬을 증폭시키기 위해 써먹는 거다. <혈의 누>와 같은 사극도 마찬가지다. 험난한 여정도 문제였지만, 사극의 가장 큰 장애는 고루하고 지루할 것이라는 관객의 선입견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단지 사건들을 쭉 나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이런 장애를 넘으려면 내러티브 안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고 봤다. 생략과 삽입이 제대로 됐는지는 관객이 판단하겠지만 전작보다 형식적으로는 한발 더 나아간 것이 아닌가 싶다. 한숏 안에서 점프컷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했으니까.

김봉석 | 플롯을 짜는데 플래시백이 효과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강 객주가 거열당하는 과거의 장면을 지켜보는 틈에 현재의 원규를 끼워넣은 장면은 어떻게 만들게 된 것인가.

김대승 | 평면적인 서술은 피하겠다는 마음이 컸다. 강박이라고 할 만큼 집착한 게 사실이다. 강 객주의 거열장면에서 원규가 등장하는 것은 남 이야기 하듯 하고 싶지 않아서다. 플래시백을 통해 아버지가 한 짓이 드러나게 되고 그 과거를 알게 됨으로써 원규가 영향을 받아야 하는데 좀더 직접적인 묘사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원규가 과거 속으로 들어가 판타지처럼 장면을 구성하면 어떨까 싶었다.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인데, 전도연이 설경구에게 아버지 어깨 위에서 목말 타는 사진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실제 목말 타는 부녀가 보인다. 이게 회상일지 판타지일지 모르겠지만 그 장면 하나가 그렇게 따뜻해 보였다. 어쩌면 거기서 발전시킨 이미지일지도 모르겠다.

김봉석 |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도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원규는 죽지 않지만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갖고 있던 신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모두 무너지니까.

김대승 | 미스터리 스릴러가 주는 쾌감 자체를 목적으로 한 영화가 아니다. 드라마라는 게 사실 나무 위에 인물 올려놓고 흔들다가 내려오는 것인데, 이번 영화는 올려놓은 인물이 아무 일 없었단 듯이 내려와선 안 된다고 봤다. 그렇게 되면 원규가 그저 스토리텔러로 머무는 것이니까. <번지점프를 하다>의 엔딩이 다소 낭만적이고 팬시한 느낌이라면, 이번 영화의 죽음은 비관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김봉석 | 실제 삶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편인가.

김대승 | 비관적인 데가 있다. 한때 사람이 주인이다, 라는 아주 조그마한 염치의 기운들이 우리에게 있지 않았었나? 그런데 IMF를 맞으면서 그것조차 없어진 게 아닌가 싶다.

김봉석 | 혈우가 내리는 장면에서 염치없는 자들은 섬에 살던 보통 사람들이다. 감독이 생각하는 염치란 어떤 것인가.

김대승 | 나보고 보수적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긴 한데. 강자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것이 염치라고 보진 않는다. 정말로 염치없는 이는 평등한 세상을 설파하지만 결국 자기 딸의 문제에선 냉정함을 잃는 강 객주다. 확실한 증거없이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는 토포사가 염치없고, 또 그런 상황에 편들어 제지소를 차지하는 김치성 대감이 염치없고, 그런 이에게 기대는 인권 또한 염치없다. 물론 윗사람들이 잘못 했으니까 아랫사람들의 행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선 선인(善人)이 나와선 안 된다고 봤다. 그런 영화를 보고 나를 포함한 우리는 어떤가 자문하게 하고 싶었다.

“<혈의 누>는 요즘 보기 드물게 정직하고 성실한 영화”

김봉석 | 아까 본인을 신인감독이라고 했는데. 요즘 신인감독들과 달리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도 많지 않고. 뭣보다 도제 시스템에서 영화를 배운 특이한 케이스다. <혈의 누>는 오랜 조감독 생활을 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가 아닌가 싶은 점이 있다. 특히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을 오래 한 것이 영화의 장점들을 돋보이게 만든다.

김대승 | 임 감독님의 조감독 경력이 도움이 됐던 것 중 하나는 사극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는 점이다. 사극을 몇편 해봤고, <춘향뎐>이 마지막 조감독 작품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개념화할 수 없고 정리하기 어렵지만 정직과 성실이라는 덕목도 그 아래서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직이라는 게 모르는 거 아는 척하지 말라, 뭐 그런 건데. 영화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실 임 감독님이 이거 찍자 저거 찍자 하시는 건 변덕이 심해서가 아니다. 성실이란 건 영화를 하는 작업이 관객과 만나기 전까지 무엇이 최선인가 파들어가는 거다. 현장에서 스탭들은 혼란스럽겠지만 이번 영화 하면서 켕기거나 찜찜한 게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영화감독이 아니라도 살면서 평생 가져가야 할 덕목들이라고 생각한다.

김봉석 | 누군가 최근에 <남부군>을 다시 보는데 촬영이나 조명이 허투루 찍힌 게 없다면서 그에 비하면 요즘 쏟아져 나오는 영화들은 너무 마구잡이로 만드는 것 아닌가 싶다고 하더라. 사실 단편영화에서 재능을 보여 빨리 데뷔한 신인감독들 중에선 어떻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영화를 찍었을까 싶은 감독들이 적지 않다. 충무로에 도제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그렇게 된 것 아닌가 싶은데.

김대승 | 틀에 갇히지 않고 상상력을 풀 수 있는 장점도 있지 않나. 몸이 가볍다는 건데 난 이미 무거워졌다. 아까 판타지 어쩌고저쩌고 했지만 내 스스로 제한을 두거나 제약을 두곤 한다. 무엇이 더 나은지는 모르겠고,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일례로 최동훈 감독 같은 사람은 조감독 생활을 하지 않았어도 치밀하게 또 집요하게 영화를 만들지 않나.

김봉석 | <혈의 누>는 요즘 보기 드물게 정직하고 성실한 영화다. 그런 점에서 반갑다.

김대승 | 내겐 부족한 게 많다. <무사>의 김성수 감독이나 <달콤한 인생>의 김지운 감독처럼 이미지만으로 힘있게 영화를 끌고 가는 테크니션들이 사실 부럽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갖고 있는 분들이고, 그래서 그들의 영화는 자극이 된다. 그래서 나도 자꾸 넓혀보려고 하는 것인데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믹싱하는 분들이 ‘이건 우리가 할게요’ 할 정도로 후반작업 때까지 내 인생의 마지막 영화라는 심정으로 죽어라 달렸는데 이제 벼랑에 선 기분이 되고 나니 지나치게 힘을 소비했구나 하는 생각도 있다.

김봉석 | 차기작으로 염두에 두는 것이 있나.

김대승 | 심란할 때면 요즘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돌려본다. 너무 많이 돌려봐서 구하기 힘든 테이프가 거의 망가졌을 정도다. 그런 따뜻한 멜로영화를 하나 하고 싶다. 예산도 좀 적고 등장인물도 적지만 사랑에 대한 감정을 깊이 파보고 싶은 영화를 해보고 싶다. 그걸 하고 나면 또 어디로 튈지 모르겠지. 두개하던 세개하던 신인감독은 신인감독이니까.

김봉석 | 어느 정도 자기 색깔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김대승 | 아니다. 따라가는 감독인데, 뭘. 할수록 어렵고 파면 팔수록 안 나오고 그런 게 영화 같다. 평들 나오면 꼼꼼히 챙겨보는 편인데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를 가져왔으면 이 장면에서 좀더 서스펜스를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뭐 그런 이야기도 듣고 하는데 나로선 할 만큼 한 거다. 시체의 손톱이 빠지는 장면도 슬프라고 찍은 건데 끔찍하다는 반응 나오는 거 보면 아직 멀었구나 싶다. <번지점프를 하다> 때도 이병헌이 여현수 멱살 잡고 ‘너 누구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기자시사 때 다 웃었다. 내심 이 영화 조졌구나 싶어 곧바로 나가서 담배 피웠다. 나중에 반응이 괜찮다는 말 들었을 때도 위로하나 싶었다. 나로서도 내 영화 보면 볼수록 쪽팔린 데가 많으니까 빨리 덮고 싶다. 한편으론 필름은 평생 남는 건데 이렇게 막 찍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싶기도 하고.

김봉석 |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김대승 | 그런 건 없다. 다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좋아한다. 굉장히 소박한 이야기로 큰 이야길 하는데 인생이나 사람에 대한 성찰이 저런 것이구나 싶다. <발레교습소>도 되게 좋아한다. 변영주 감독이 부러웠다. 영화 보면 고3 애들한테 감독이 던지는 니네 힘들지, 하는 따뜻한 목소리나 격려가 들리더라. 그런 것 보면 아직 난 멀었다. 진정성을 말하는 것이 우스운 시대가 돼버렸지만, 그런 영화를 하고 싶다. 자칫하면 끊어지고 놔두면 날아가는 명주실 하나 잡고 가는 심정은 영화를 만든다면 언제나 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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