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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들고 철들었다, 다큐멘터리 감독 이미영
사진 오계옥이영진 2000-04-11

‘묻혀버린 봄’을 캐기 위해 ‘카메라를 든 아가씨’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89년 석탄산업합리화 조치로 폐촌 위기에 몰린 강원도 정선고한군 사북읍. 경지라곤 찾아 볼 수 없는 해발 700m 새카만 고산지대다. 그곳의 자욱한 탄가루에 몸을 묻고 살아왔던 이들도 서슴없이 ‘인생막장’이라 부르는 그곳은 숨쉬기조차 껄끄러울 정도다. 4월까지 매서운 동풍이 몰아치는 터라 늦은 봄이 와도 검은 진물만이 흐른다. 이미영(25)씨는 이곳에서 2년 동안 <먼지의 집>을 찍었다. 이 영화는 97년 사북 동원탄좌의 하청업체인 제일기업이 일방적으로 직장을 폐쇄하자 이에 항의하는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았다. 올해 <민들레><레드헌트2>와 함께 스위스 프리부르영화제에서 상영된 50분 길이의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대부분 9가구씩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볼품없는 사택에 사는 이곳 노동자들은 언제 진·규폐증으로 신음을 토해낼진 모르지만, 그래도 폐광, 폐촌 위기에 직면한 이곳이 자신들에겐 소중한 터전이라고 항변한다. 늙은 광부들의 노래를 가난한 카메라로 받아 적은 이미영씨는 <먼지의 집>의 톤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무기력해 보일 수도 있지만, 섣불리 어설픈 희망을 덧칠하긴 싫었다”고 말한다. 3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북에 내려온 그는 현재 1980년 4월 사북사건을 재조명할 <봄>을 촬영중이다. 극한 노동조건 개선, 어용노조 퇴진을 내걸었지만 언론에 의해 ‘폭동’으로 매도되고, 결국 관련자 모두 고문과 옥고를 치러야 했던 사북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6개월 동안 자료를 모았고 당시 군법재판을 주도한 이들까지 인터뷰 대상으로 확보했다. 구성은 1980년 바리케이드로 막혀버린 사북의 핏빛 과거와 2000년 카지노로 가려진 사북의 잿빛 미래를 뒤섞을 생각이다. 파트리치오 구즈만 감독의 <칠레, 지울 수 없는 기억>처럼 과거의 희열과 상흔들이 세월이 흐른 뒤 개인들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지 따라갈 수 있다면 더 좋겠다고 덧붙인다.

사북에선 유명인사(?)라 카메라를 들고 나설 때면 미리 차가 준비될 정도라는 이미영씨는 정체가 탄로나 오히려 작업하기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프리부르영화제에서 들었던 ‘감독’이라는 호칭도 부담스럽다. 들뜨지 않고 겸손을 지켜내야 하고, 그렇다고 외골수가 돼서도 안 된다는 게 자신의 원칙이다. 가진 사람들의 여유보다 못가진 사람들의 여유가 훨씬 기름져 보여 선택했다는 다큐멘터리 작업, 오가와 신스케의 후루야시키 마을처럼 자신에겐 사북이 있어 편안하다. <봄> 끝내고 나면 어부들의 삶을 건지기 위해 바다로 나가볼 생각도 있다. “사북의 봄이요? 땅도 질퍽질퍽하고 퀴퀴한 건 여전하고. 그래도 퉁퉁 뛰는 사람 심장소리만큼은 움츠린 겨울보다 크게 들려 좋죠.” 카메라 들고 나서부터 철들었다는 아가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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