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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역사는 흐른다
유재현(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2005-05-27

베트남전쟁 종전 30돌 기념일이 있었다. 우리가 베트남전쟁으로 알고 있는 이 전쟁의 본명은 ‘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다. 1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패퇴한 프랑스의 뒤를 이어 미국이 도발했던 이 전쟁은 1973년의 평화협정과 미군 철수, 1975년 4월17일 크메르루주의 프놈펜 함락, 4월30일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의 사이공 함락, 8월23일 파텟라오의 위엥찬 함락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전대미문의 학살전이었다. 150만명의 베트남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1965년에서 1973년까지 대개는 미군의 맹폭으로 60만명, 35만명 이상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어야 했다. 인구비로 본다면 베트남보다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인명피해가 압도적으로 컸다. 미군 6만여명, 2위 참전국인 한국군도 5천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20세기 최대의 제국주의전쟁으로 일컬어지는 2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미국이 저질렀던 범죄적 악행은 3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티끌만큼도 심판되지 못하고 있다. 250만명의 생명이 덧없이 스러져가야 했던 참혹한 전쟁의 주범이었던 미국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 흔한 외교적 수사로서의 유감표명조차 없었다. 지난 2000년 종전 뒤 최초로 베트남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이 남긴 말은 “고통스러웠던 과거는 평화롭고 번영된 미래를 통해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끄럽고 불쾌한 역사의 완전삭제는 언제나 제국주의의 전매특허지만 놀랍게도 클린턴의 이 발언은 미국과의 수교 전부터 베트남 고위관료들의 입을 빌려 수없이 반복되어온 베트남의 공식적 입장을 다시 한번 반복한 것에 불과했다. 하노이를 찾았던 클린턴은 그저 장단을 맞추었을 뿐이다. 1995년 베트남과 미국의 국교정상화는 그렇게 굴욕외교의 전형이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양민학살, 맹폭, 고엽제 피해, 그 모든 전쟁범죄는 은폐되고 목이 졸려 매장되었다. 그 대가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아니 정확하게는 베트남공산당이 얻은 것은 미국의 시혜적 배려와 외자 도입, 몇푼의 달러였다. 이것이 두 차례에 걸친 60년의 제국주의전쟁에서 결국은 승리를 쟁취한 베트남이 인도차이나를 대신해 30년 만에 벌인 위업이다.

남한의 참전과 양민학살 등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믿음 속에 베트남으로 달려갔던 사람들은 ‘모두 지난 일’이라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베트남에서의 이런 체험을 승자의 관용 따위로 해설하곤 하지만 사실은 베트남공산당의 역사 지워버리기에 목덜미를 잡혀 흘리는 신음일 뿐이다. 나는 베트남 인민이 베트남공산당의 이런 몰역사적인 태도에 진심으로 동의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런 모욕을 받아야 할 이유가 베트남 인민에게는 없다.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국가와 맞서 승리했던 인도차이나의 역사는 어느 한 지역이 아닌 세계의 역사였다. 1968년 아시아와 아프리카, 북미와 남미, 오세아니아의 주요한 도시에서 외쳐졌던 슬로건의 하나는 ‘베트남전쟁 반대와 미군 철수’였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징집영장을 불태우고 플래카드를 들고 최루탄과 몽둥이에 맞서 거리에서 돌을 던지지 않았다면, 파리와 런던, 로마와 마드리드, 멕시코시티와 도쿄, 베오그라드와 아바나에서 미제국주의와 인도차이나전쟁을 반대하는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나오지 않았다면 베트남은 승리할 수 없었다. 베트남의 승리는 제국주의를 반대했던 전세계 양심세력의 승리였다.

그 역사는 어떻게 교살되었는가. 통일 뒤 남베트남의 임시혁명정부(민족해방전선)를 폭압적으로 밀어낸 뒤, 라오스를 위성국으로 만들고 캄보디아를 침략해 스스로 프랑스와 미국을 대신해 인도차이나의 패권국이 되는 길을 걸었고, 비옥한 삼각주를 둘이나 가지고도 식량조차 자급자족하지 못하고 소련에 매달려 베트남을 저열한 스탈린주의 국가로 전락시켰던 베트남공산당의 손으로 질식되었다. 소련의 몰락 뒤 중국을 흉내낸 도이모이(개혁개방정책)로 비틀거리다 결국은 구걸하다시피 미국과 자본주의의 품에 안겨버린 베트남에 남은 것은 여전히 철권을 휘두르고 있는 사회주의와는 무관한 늙고 부패한 베트남공산당의 건재일 뿐이다.

30년 전의 그날과 함께 바로 그 30년도 보아야 한다. 역사는 결코 멈추는 법없이 강물처럼 흐르고, 우리는 그 강물을 타고 미래로 전진한다. 베트남전쟁 종전 30돌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