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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7인 특강 [4] - 문소리·박찬욱 ③
사진 이혜정 정리 문석 2005-05-31

5월18일 <씨네21> 창간 기념 세 번째 특강, 박찬욱 감독의 ‘작품세계’를 듣다

“셰익스피어에게서 딜레마를 배웠죠”

이성욱 | 우선 <친절한 금자씨>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금합니다.

박찬욱 | 현재 편집까지 끝난 상태입니다. 오늘은 사운드에 대해서 처음으로 상의를 했습니다. CG나 디지털 색보정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후반작업도 남아 있죠. 이 영화가 어떤 영화가 될지…. 확실한 것은 <복수는 나의 것>과도 다르고, <올드보이>와도 다르다는 점인 것 같아요. 그리고 세편 중에서 제일 이상한 영화…. (웃음) 그것도 확실해요. 이영애씨가 하는 행동이나 표정이나 말투나 이런 것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고 다니는지 잘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영화가 한 3분의 2쯤 갔을 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탁 수정하는 순간이 나와요. 갑자기 궤도수정을 하기 때문에 당황하게 될 거예요. 그것이 뭐 매력이라면 매력일 테고. 만약 그것이 실패하면 영화에 그동안 적응해온 관객은 굉장히 당황하고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다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내가 기자분들에게 미리 얘기해두겠는데 만약에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다면 그것 때문이라고 쓰시면 돼요. (웃음)

이성욱 | 7월 말이면 이 얘기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 같고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남동철 | 오늘 이 자리에서는 구체적인 영화 얘기보다는 감독님의 연출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그런 얘기가 됐으면 좋겠는데요. 먼저 과연 박찬욱 감독이 좋아했던 영화들의 궤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박찬욱 | 저는 어렸을 때는 TV의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 이런 데서 영화를 많이 봤어요. 대개가 할리우드 고전들이었죠. 제일 많이 본 영화는 어머니가 좋아했던 마빈 르로이 감독의 <애수>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수많은 서부극들이 기억나요. 서부극은 지금도 굉장히, 정말 노스탤지어를 갖고 있어요. 할리우드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자고 찾아오면 제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은 서부극을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정말 미국에서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고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처럼 비영어권 출신 감독이 성공시킨 전례가 있는 분야니까요. 그 다음에는 제임스 본드 영화를 좋아했어요. 예전 소년들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나 그런 것을 읽으면서 상상의 바다로 나갔다면, 저는 그런 영화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 들어와서 히치콕을 집중적으로 보게 됐어요. <현기증>은 그때나 지금이나 히치콕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모두가 좋아하는 그런 영화, 그런 감독이 아닌 작품들을 찾기 시작했는데, 아벨 페라라, 할 하틀리,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하게 됐죠. 그 이후에는 아주 본격적으로 영화광으로 살며 잡다하게 여러 가지 영화를 좋아하고, 반하고 그랬죠. 요즘에는 베리만 영화를 제일 좋아하고 늘 감탄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남동철 | 감독님의 영화는 모든 요소가 매끈한 채로 적당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요소는 과잉된 채 존재하는 그런 영화가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그런 과잉의 영화에서 느끼는 특별한 매력이 어떤건지 궁금합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 때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딱 생각하는 게 누구나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좀더 강하게 해야 그것을 제대로 수행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그 이유일 것 같아요. 히치콕이나 할리우드 고전감독들이 보여준, 완벽하게 안정돼 있고 조화로운 세계, 그건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 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아요. 그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아주 한가한 짓이다라는 기분이 들어요. 적성에도 안 맞고, 지금의 격동하는 상황이 그런 조화로운 세계, 안정된 세계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요.

남동철 | 미국 <빌리지 보이스>의 평 중에 감독님 영화가 현대영화의 지형도에서 셰익스피어와도 같은 영역을 차지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씨네21> 7주년 때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이야기의 갈등구조, 전개방식은 셰익스피어를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감독님이 셰익스피어에게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요.

박찬욱 | 셰익스피어가 다루는 사람들의 딜레마, 그것이 항상 그를 생각하게 하는 점이에요. 이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 것인가, 지금 어떤 선택은 무시무시한 결과로 갈 수도 있고 그냥 안정되게 갈 수도 있다. 제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도덕적인 딜레마는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햄릿>에서 햄릿이 숙부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지만 숙부가 기도를 하는 중이라서 물러나는 대목이 있어요. 기도하는 중에 죽이면 숙부가 천국에 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 아까운 기회를 버리는 거죠. 그 장면이 감동을 줬어요. 일단은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했어요. 약간 궤변 같고. 너무나 잔인한 생각인 게, 동기는 잔인한데 결과는 반대방향이라는 점이죠. 그런 폭력과 잔인성과 유머…. 윤리적인 문제에서 굉장히 복합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언제나 폭력장면에서의 윤리성, 폭력이 수행되거나 연기될 때 윤리성에 대해 항상 생각하게 돼요.

남동철 | 또 캐릭터 형성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이나 발자크의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박찬욱 | 발자크의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의 책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니까 발자크를 통하면 수많은 사람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역시 윤리의 세계인데, 러시아 사람들의 성격은 어떤 원칙이나 세계관, 고민거리가 있을 때 대충 생각하고 치우는 게 아니고 그 근본까지 가야 직성이 풀린다고 하죠.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는 철학, 사상이 생활이나 일상행동과 별개가 아니에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뜻밖에도 유머러스한 작품이 많아요. 예를 들어 <영원한 남편> 같은 것은 개그소설이라고 할 만큼. <죄와 벌>에도 웃기는 장면이 많이 나와요. <복수는 나의 것> 마지막 부분에 4명의 테러리스트가 송강호를 죽이는 장면은 어느 정도 <악령>에서 가져왔다고 할 수 있어요. 거기서도 역시 무정부주의자들인가, 그 사람들이 배신자를 처단하는 장면인데, 묘사가 너무 생생하고 긴장을 일으키는 장면이어서 마치 영화로 본 것처럼 기억이 아주 생생해요. 그때 기억을 갖고 만든 게 그 장면이에요.

남동철 | 예전에 데릭 엘리라는 평론가가 감독님 영화에 대해 ‘아시아에서 온 그리스 비극’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리스 비극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박찬욱 | 사실 <올드보이>는 노골적이라 할 수 있죠. 오대수의 혀를 자르는 행위나 딸과의 근친상간은 <오이디푸스>를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었어요. 처음부터 소포클레스를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근친상간 테마가 등장하면서 그런 시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르는 행위에 맞먹는 어떤 행위가 등장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애초 오대수의 행위는 성기를 자르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최민식씨의 반대가 워낙 컸기 때문에…. (웃음) 혀를 자르는 걸로 바뀌었죠. 그리스 비극에서는 항상 신의 의지, 농간에 의해 인간들이 움직이곤 하죠. 그러다보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질문을 던지게 돼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신들은 인간이 하는 노력을 지켜보다가 마음을 바꾸기도 하죠.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면도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신의 의지에 따르기도 하고, 맞서기도 하죠. 제가 묘사하고자 하는 주인공들은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운명과 맞서 싸우는 자예요. 패배가 예정돼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싸우려는 사람이죠. 시작할 때는 보잘것없었으나 그 투쟁의 과정에서 어떤 숭고한 아름다움을 획득하게 되는. 운명과 싸우는 사람의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숭고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남동철 | 감독님은 자신의 영화가 늘 구원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운명론이 굉장히 처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과연 어디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박찬욱 | <친절한 금자씨>에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웃음) <…금자씨>는 ‘복수 시리즈 에피소드3: 새로운 희망’이라고 할 수 있어요. (폭소) 아주 어리석고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을 하고 아주 잘못된 방식으로 속죄하려는 여자의 이야기인데, 그 여자의 구원을 향한 노력은 다 물거품처럼 돼버리죠. 그러나 관객이 금자에 대해 잘했다고는 못해도 ‘애썼다’, ‘수고했다’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라요. 그녀가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는 수고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말하는 희망은 그 수고에 있어요. 그 길이 끝내 잘못됐다고 밝혀지는 길이라도 그 수고에 희망이 있다고.

관객1 | 혹시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에 감독님을 지탱할 가치관이 있나요.

박찬욱 | 이렇게 말로 드릴 만한 가치관을 정리한 건 없어요. 그냥 가훈이 있죠. 우리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되자마자 숙제로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아왔어요. 그래서 급조된 게 ‘아니면 말고’예요. (웃음) 그렇게 적어보냈더니 선생님이 무슨 뜻인지 알아오라고 했대요. 그래서 사람 힘으로 안 되는 일에 너무 매달려서 속썩이지 말자는 뜻이라고 했어요. 책이나 TV를 보면 뭐든지 사람의 힘으로 다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안 되는 걸 이룩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고 미련하고 불쌍한 일이죠. 안 될 건 빨리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죠.

관객2 | <달은…해가 꾸는 꿈>으로 쫄딱 망하고 <3인조>로 또 쫄딱 망하고, 그런 뒤 <공동경비구역 JSA>을 하셨습니다. 그 긴 시간을 견디면서 빨리 포기하지 않은 것은 나중에 잘될 것을 알아서였나요.

박찬욱 | 솔직히 말하면 될 줄 알았기 때문에…. (웃음) 그때를 생각해보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오기였겠죠. 그때는 곰곰이 생각해봐도 지금 활동 중인 감독이나 지망생 중 나만큼 영화를 잘 만들 것 같은 사람이 안 보였어요. (웃음) 그런데 실패한 두편을 근거로 생각해봤을 때 그렇게 스스로 믿을 만한 구석이 없더라고요. 앞으로 아주 괜찮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러니까 영화를 그만두는 것이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과대망상이 있었으니까.

관객3 | 영화감독이나 셰익스피어처럼 학습적인 영향 말고 환경이나 주변 사람에 의한 드러나지 않는 영향도 있나요.

박찬욱 | 그건 제가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정보를 알고 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많이 하는 질문인데요. 거기에 대해서는 뭐 약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어릴 때부터 가톨릭 분위기에서 자랐으니까. 그런데 한국 가톨릭은 좀 진보적인 성향이라 유럽인들이 제 영화를 보면서 연결시키는 그런 이미지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물론 죄의식의 문제라든가 아이콘이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풍성한 비주얼 요소는 영향이 있었겠지만.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죠. 어릴 때 동네 신부님이 부모님을 찾아와서 저를 신학교에 보내라고, 추기경감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성당에 안 가기 시작했어요. (웃음)

관객4 | 감독님은 여러 외국 웹사이트에서 추앙받고 칭송받는 수준입니다. 감독님의 작품을 사랑하는 팬 입장에서는 좀더 자본의 여유가 있고 상상력의 제한이 없는 미국에서 작품을 하는 게 세계 영화계에서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어떠한가요. 그리고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리메이크를 거절한 이유는 뭔가요.

박찬욱 | 샘 레이미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블 데드>를 리메이크해달라고 제의한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일본 감독들이 미국에서 다 공포영화로 진출하잖아요. 그렇게 아시아 감독이 공포영화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유행에 휩쓸리는 게 싫었고요, <이블데드>는 그때 그런 식으로 조잡하게 만든 게 좋았던 것 같아요. 많은 돈을 들여 만드는 건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할리우드에서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데 다들 비밀로 해달라고 하니까 뭐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썩 매력적인 것은 아직 없었어요. 더불어 좋은 각본을 아직 못 읽어봤다는 것. 좋은 각본과 프로듀서가 생기고 이러면 못할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급할 것은 없다, 안 해도 그만이다, 이런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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