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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척 마라, 당신도 그들과 같다, <킨제이 보고서>
신윤동욱(한겨레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이관용 2005-06-01

<킨제이 보고서>로 본 미국과 한국의 현실, 나의 경험

<킨제이 보고서>는 킨지에 대한 보고서다. 영화의 중심에는 킨지의 보고서보다 인간 킨지가 서 있다. 킨지의 성생활은 킨지의 연구활동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당근’ 연구활동보다는 성생활에 관심이 쏠리는 관객에게 매우 유익한 텍스트였다. 킨지의 고통과 희열은 나의 그것과 겹칠 수도 있으며, 인터뷰 대상자들의 고민이 나의 고민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킨제이 보고서>는 킨지에 대한 보고서일 뿐 아니라 나에 대한, 우리 사회에 대한 보고서다. 게다가 <킨제이 보고서>는 하나의 보고서로 세개의 텍스트를 읽게 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선물했다. 미국의 오늘날, 한국의 현실, 그리고 나의 경험이 바로 그 세개의 층위다.

킨지 보고서는 ‘미완의 혁명’

벌써 반세기도 넘었다. 킨지 보고서가 세계를 뒤흔든 때로부터. 그러나 그 성혁명은 영구혁명으로 남아 있다. 영구히 완수되지 못한 혁명 말이다. 반대파의 저항이 매우 교묘하고 완강하기 때문이다. 혁명과 반혁명의 순환은 역사의 시계추를 앞으로 돌리지 않고 제자리걸음치게 했다. 그래서 반세 전의 미국과 오늘의 미국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성을 둘러싼 담론의 세팅은 그대로다. 반세기 전 청교도 목사인 킨지 아버지의 황당한 설교는 오늘날 미국 유명 복음주의 목사들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목사님들은 담뱃갑에 붙이듯 성행위에 경고문을 붙인다. “구강성교는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규칙적인 성교와 자위는 성불구자를 만들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 황당한가? 오늘날 설교의 버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에이즈 예방에 금욕만큼 좋은 예방법이 없다”, “사악한 정념이 일 때마다 기도하라”. 지난 미국 대선에서 확인됐듯이 청교도 엄숙주의자들은 여전히 미국의 주류다. 킨지가 뛰어넘으려고 했던 ‘혼전순결, 혼외정사, 이성애’의 신화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이데올로기 무기로 쓰이고 있다. 킨지 보고서가 스캔들이 되자 킨지는 말한다. “순결을 강조하는 자들이 다시 뭉쳐서 과학자들을 위협하려 한다”고. 영화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킨지는 탄식한다. “우리 사회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요”라고. 마치 2005년에 다시 살아난 킨지의 탄식 같다. 영화는 반세기 전의 이야기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아직도 이런 일들이!”,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 반세기 전의 <킨제이 보고서>는 오늘의 미국에 대한 보고서로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도 미국은 좀 낫다. 한국의 오늘을 생각하면 영화는 더욱 불편해진다. 반세기 전의 <킨제이 보고서>는 오늘날 한국인에게 너무 급진적이다. 킨지는 “억압적인 사회는 성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고 말하는데, 한국사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킨지가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고백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우리가 모르거나 모르고 싶어하는 경험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정상인가요?” “체위가 한 가지 말고 또 있나요?” 이 땅의 고민남, 고민녀들이 오늘도 어느 상담실에서, 어느 게시판에서 여전히 묻고 있을 법한 질문들이다. 13살 소년이 동성애를 했다고 가족들이 인두로 낙인을 찍은 사례는 21세기 한국의 신문, 잡지, 방송이 쏟아내는 구태의연한 사례보다 훨씬 ‘리얼’하다. <킨제이 보고서>는 성교육 교재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21세기 한국의 <킨제이 보고서> 관객은 반세기 전 킨지의 ‘결혼생활’ 강의를 듣던 학생들과 닮았다. 학생들이 킨지 교수의 적나라한 강의 내용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듯, 관객도 <킨제이 보고서>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한다.

그리고 나를 반추하다

<킨제이 보고서>를 보면 끝내 나(의 경험)를 반추하게 된다. 혼전순결을 지킬 정도로 숙맥이었던 킨지 박사는 날로 ‘까져서’ 몸소 동성애를 실천하시고, 스와핑을 실행하신다. 게다가 부인에게 자신의 동성애 외도를 고백까지 한다. “섹스한다고 모두 사랑하는 건 아니야”라는 말까지 곁들이면서. 남편의 외도에 상처받았던 부인은 남편의 외도 상대와 성관계를 가지기도 한다. 킨지는 그 관계를 인정한다. 세 사람을 보면서 성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과연 배타적인 파트너십을 넘어서는 관계는 가능한가? ‘오픈 릴레이션십’(Open relationship)이라고 불리는,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 성에 대해서는 열려 있는 관계는 가능한가? 오늘의 윤리 상황에서는 부득불 욕망의 충족이 감정의 상처와 교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시뮬레이션’하게 된다.

<킨제이 보고서>는 스스로 도전했던 ‘컨벤션’의 품으로 돌아간다. 낭만적 사랑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섣부른 실험은 위험한 사랑을 낳는다고 제자의 질투를 통해 설파한다. 킨지 자신도 “사랑은 측정할 수 없는 것” 따위의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게다가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구구한 설교도 늘어놓는다. 나무를 붙잡고 나무아미타불을 늘어놓는다. 몸소 동성애와 스와핑을 실천하시던 킨지 박사의 실험정신은 무소불위의 강력한 이데올로기, 사랑의 위대함 앞에서 끝내 꼬리를 내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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