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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좋은 스승이 되는 법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 일러스트레이션 신용호 2005-06-03

최근에 나는 ‘브로커’를 자처하는 몇몇 친구들 덕분에 국제워크숍에 참석차 뜻하지 않게 미국을 갔다 왔다. 그 워크숍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일단 참석자를 정확하게 발표자와 토론자와 필수적인 사람들로 제한해서, 개인적인 관심으로 찾아온 대학원생조차 ‘내쫓는’ 것이 처음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토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 초청된 사람만으로 참석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참석한 우리는 4일 동안 줄곧 꼼짝없이 워크숍에 붙잡혀서 토론을 해야 했다. 참석자가 서로 얼굴을 피하기 힘들 정도로 제한되어 있으니 힘들다고 중간에 빠져나가거나 늘어져 쉴 수도 없었다. 게다가 발표자나 토론자로 외국에서 초청되어 참석한 처지에선, 토론에 제대로 참석하기 위해선 새벽부터 일어나 관련된 글을 열심히 읽고 준비해야 했다. 덕분에 토론회는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다. 참석자 제한은 충분히 그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좀더 인상적인 것은 그 회의에 참석한 한 노인이었다. 작은 체구에 단단하고 강한 인상. 직선적이고 다혈적인 성격의 노인이었다. 해리 하르투니언. 솔직히 말해 그 회의에 초청되기 전에는 이름도 잘 모르던 분이었다. 회의 참석을 준비하면서 그의 책을 처음 읽었다. 그런데 이른바 ‘시카고 학파’의 대부라는 이 노인은 76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회의의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무언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고,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많이 발언했다.

그 회의 전체를 조직하고 주재한 마이클 신 교수는 그의 제자였다고 하는데, 자신의 스승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각별했다. 그에 따르면 하르투니언 교수는 대학원 수업을 하면서는 학생 한명한명을 매주 한번씩 불러서 주어진 텍스트를 제대로 읽도록 질문하고 가르치며 엄하게 훈련시켰다고 한다. 덕분에 그 제자들은 역사학자들이면서도 철학적 훈련까지 받을 수 있었다고 전하는 그의 말에는 자긍심이 배어 있었다. 또 하르투니언 교수는 자신이 담당하는 대학원 수업 말고도 공동으로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자신의 제자와 공동강의를 만들어 함께 공부하고 함께 가르쳤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학생뿐만 아니라, 함께 가르치는 동료나 제자교수, 그리고 자신이 동시에 배우고 공부하는 방법이었을 게다. 그는 이번 학기에도 뉴욕대학에서 그런 공동강의를 통해 새로운 주제를 함께 연구했다는 얘기를 그 대학의 박현옥 교수에게 들었다. 그는 아직 ‘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애정과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조그만 방에 ‘갇힌 채’ 이런 양반을 상대해야 했기에, 우리는 입술이 터지고 머리가 아프도록 긴장된 상태로 공부하고 토론해야 했다. 서로 많은 것을 주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좋은 스승이란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오고 며칠 지나서 스승의 날이라고 한 ‘친구’가 인사로 상기시켜준다. 사실 나는 스승의 날은 물론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챙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이 친구처럼 누군가 스승의 날이라고 챙기거나 혹여 꽃이라도 들고 오면 아주 쑥스럽고 당혹스럽다. 그것은 단지 기념일 알기를 우습게 아는 나의 못된 성정 탓만은 아닌 듯하다. 그건 차라리 ‘스승’이란 말에 실린 무게를 감당하기가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직 그에게 ‘하늘 같은 은혜’를 감당할 만한 ‘스승’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승’이란 단어가 흔히 쓰는 ‘선생’이나 ‘교수’ 등과 달리 부담스런 무게를 갖는 것은 그것이 단지 가르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란 의미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을 촉발하는 선생, 새로운 지식을 산출하도록 가르칠 수 있는 선생, 함께 공부하고 함께 살아가는 친구 같은 선생, 모름지기 그런 선생이 될 때에만 ‘스승’이란 말은 제값을 하는 것일 게다.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이런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 건네는 꽃 한 송이를 언젠가 아무런 부담없이 편안하게 받을 수 있다면! 이런 날을 위해서라면, 당분간은 스승의 날을 좋은 선생을 꿈꾸는 날로, 혹은 좋은 스승이 되는 법을 상기하는 날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하르투니언 교수가,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부럽게 다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