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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 챙기느라 내가 죽을 ‘날’들이여!
최보은 2005-06-03

마음보다 지갑으로 말해야 하는 날, 날, 날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그동안 산천은 수백만 가지 초록으로 뒤덮였는데, 내 지갑 속의 초록은 자취도 없어졌다. 그놈의 날들만 없었으면 5월이 얼마나 더 푸르렀을까. 아, 챙기느라 내가 죽을 날들이여, 산산이 부서지는 지폐여!

그러다보니 느끼는 건데, 달력도 그때그때 청소하고 빨래해줘야 한다. 어린이날이라든가 어버이날이라든가 스승의 날 따위는, 말하자면 달력의 묵은 때다. 이젠 날 정해서 애들 챙겨주고 부모님 공경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됐으니깐 말이다.

어버이날 전날 변영주 감독을 만났다. 가족모임을 앞두고 비싼 카네이션 꽃을 사, 말아, 고민하던 끝이라 무심코 “자기는 카네이션 안 사?” 하고 물었더니 눈을 똥그랗고 뜨고는 “내가 마약을 했어요, 도둑질을 했어요? 이만큼 살아주는 것도 고마운 거지”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자식들이 이런 쿨한 철학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봉투업계는 속상할지 몰라도, 마음만은 훨씬 더 평화로운 사회가 될 텐데.

딴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는 이런 특별한 날들이 강요하는 가족모임이 심히 부담스럽고 닭살스럽다. 가족들의 특별행사라는 게 저마다 형편되고 시간날 때 하는 것이지 나라가 받아준 날에 전국 모든 가족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이제부터 효도 실시! 복창해야 되는 게 뇌기능과 효심 발달에 하등 쓸데없는 멍청한 숙제 같다. 시댁과 친정, 본가와 처가의 방문을 어떻게 나누고 봉투의 두께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 따위, 멀쩡한 효심을 괜스레 시험에 들게 하고 부부싸움이나 유도하는 고민은 부모님 생신이나 몇 차례 대형명절 때만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말이다. 자식들의 자발성을 믿지 않는 효도 강요가 공연히 부모자식 관계를 부담스러운 짐으로 만들어버린 사례를 나는 수천만 가지 알고 있고, 국회가 요구하면 언제든지 제출할 수 있다(설마 진짜 요구하진 않겠지?). 내친 김에, 나 같은 소녀가장 엄마에게 어린이날 외출은 영 내키지 않는 무엇이다. 엄마아빠 양팔에 낀 동년배들을 보는 아이들 마음이 어떨까 싶은 거다. 그 자격지심 보상하느라 괜히 헛돈 더 쓰게 되고 말이지. 게다가 노동력의 문제도 있다. 우리 애들 소원은 테마파크 가는 건데,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특별한 날 놀이공원에서는 줄 서는 사람이 최소한 두명은 돼야 하는 것이다.

이혼가정뿐만 아니라 돈없는 사람, 가족없는 사람 등등등 마이너리티들에게는 이런 날들은 하루빨리 사라져줘야 할, ‘결핍’과 ‘비정상’을 얄미운 방식으로 환기시키는, 주류사회의 은근한 결속력 다지기 행사이며 세 과시이기도 한 것이다.

뿐인가. 대체로 무슨 이름 붙은 날들은 지갑사정에 아랑곳없이 돈으로 굿해야 하는 날, 스트레스받는 날, 남하고 비교되는 날이라 해도 맞는 말이지 싶게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돌날, 생일날, 결혼식날, 장례식날 할 것 없이 돈을 뭉텅뭉텅 즈려밟지 않고는 지나갈 길이 없다.

그런 날들 챙기느라고 나의 날은 나날이 줄어들고 말이지. 이러다간 병역이 아니라 온갖 날들에의 의무복무를 피하기 위해서 국적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그게 오버라고 한다면, 음, 우선 나부터라도 내 뜻과 상관없이 이름 붙여진 각종 날들을 사보타주할 수밖에 없겠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내년 어린이날엔 국물도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뭣보다도, 엄마는 지금도 니들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앉아 있는 것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귀여운 척^^), 내년 5월8일에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아 있을게요. 어머니가 바라시는 유일한 선물이 그거, 맞죠?

사진출처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