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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5·18 일기
이영진 2005-06-03

1980년 5월18일 난 손수건 이름표를 단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가게는 시내 중심부인 금남로에 있었다. 5월1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이제 막 자신의 가게를 차린 아버지는 휴일이라도 쉬지 않으셨던 것 같다.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 친구도 없던 난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가게에 갔었고, 금남로 5가의 4거리에 있는 유명약국(이름대로 정말 광주에선 유명한 약국이었다)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개머리판으로 한 남자를 무자비하게 짓이기는 것을 봤다. 꽤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무섭진 않았다.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였나. 아니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몰라서였나. 정말 오랫동안 지켜봤다. 이튿날엔 늦잠을 잤던 것 같은데 부모님은 날 깨우지 않았다. 학교에 안 가도 된다고 했고, 그저 집에서 꼼짝말라고 했다. 저녁 늦게 들어온 부모님이 어느 골목길에서 멍석에 둘둘 말린 시체를 보았다는 말을 잠결에 들었다. 그런 날들이 일주일 넘게 계속됐다.

1990년 5월18일 처음으로 학교 담장을 넘었다. 월요일 오후 5교시, CA라 불리는 학급회의 시간이었다. 곱슬머리 각진 얼굴의 우리 반장은 갑자기 찌라시를 뿌리더니, 금남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있다며, 교실을 뜨자고 했다. 시내 고등학생들이 다 모인다고 하니 빠구리(지역마다 뜻이 다르지만 내 고향에선 수업 받지 않고 교실을 자의로 이탈하는 행위를 말한다)라도 뒤에 별탈이 없을 것 같았다. 일찍 집에나 가자는 심산에 서슴없이 동참했다. 운동장을 반쯤 건너갔을 무렵, 대낮에 소주 한잔 걸친 선생들이 교문을 들어오다 이 광경을 보고 제지에 나섰지만 별수 없었다. 17 대 1이면 모를까. 선생들은 턱없이 부족했고, 우리는 쉽사리 월담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전해들은 이야기와 달랐다. S학교만이 도청 앞 분수대에 자리했었고, 자율학습 폐지를 요구하려고 했던 이날의 맥없는 시위는 지방 뉴스에서도 다뤄지지 않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1993년 5월18일 25번 버스를 타고 가다 망월동 종점에서 내렸다. 묘지까지 가는 길은 멀었지만 포근했다. 5km 넘는 길을 걸어 해가 지기 직전에야 도착한 무덤 주위는 참배객들이 빠져나가선지 조용했다. 도청에서 총들고 죽어간 윤상원의 묘지였는지, 꼿꼿해서 쓰러진 김남주의 묘지였는지, 거리에서 피흘린 이한열의 묘지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유없이 엉엉 울었다. 너무나 서럽게 울어서 주위 친구들이 “쟤, 왜 저러냐?”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잔상들이 유령처럼 뚜벅뚜벅 다가와 말을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 여기 왜 왔니?” 마음이 허할 때면 망월동 찾는 몽유병은 군대에 가서도 계속됐다. 휴가를 나올 때면 언제나 25-1번 버스를 타고 그곳엘 갔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고, 5월이 아니어도 좋았다.

2005년 5월19일 어제는 광주항쟁 25주년이었다. 마감을 하느라 5·18인 줄도 몰랐다. 5월19일이 되어서야 5월18일이 지났음을 알았다. 누군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기억할 때 기존 질서의 위장(僞裝)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던가. 5·18 묘소가 공동묘지로 바뀌고 또 국립묘지로 성역화되면서, 망월동 가는 길에 경운기보다 그랜저가 더 많아지면서, 이제 역사에 질식한 영혼들에 대한 죄책감은 벗어던져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어쩌면 나도 슬쩍 승차했는지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서른셋, 일찌감치 늙어버린 내가 싫다. 5월18일에 관한 기억들을 되새기는 것으로 면죄가 될까.